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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2차 침입 – 양규가 지켜낸 고려

전문가팀 2025. 2. 9.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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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년(현종 1년), 거란이 고려를 다시 침입하며 동아시아의 정세는 격변했다. 거란(요나라)은 993년 1차 침입 당시 서희와의 외교 담판을 통해 고려와 일시적인 평화 협정을 맺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고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특히 고려가 여전히 송나라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점은 거란에게 큰 불만이었으며, 이를 빌미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고려를 침공하게 된다.

 

거란의 2차 침입은 1차 침입과는 달리 더욱 강력하고 조직적인 침략이었다.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한 거란은 수도 개경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지만, 고려군의 끈질긴 저항과 전략적인 반격으로 결국 철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양규(楊規)였다. 그는 거란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게릴라 전술을 펼쳐, 거란군에 큰 피해를 입히는 등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이번 글에서는 거란의 2차 침입 배경과 전개 과정, 그리고 양규의 전략과 활약을 중심으로 살펴보며, 이 전쟁이 고려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를 되짚어보겠다.

 


거란의 재침 이유

거란이 고려를 다시 침공한 가장 큰 이유는 고려가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지속했기 때문이었다. 1차 침입 이후에도 고려는 송과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며 친송 정책을 고수했다. 거란은 이를 고려가 자신들에게 완전히 복속되지 않았다는 증거로 해석했고, 다시 한 번 고려를 무력으로 제압하려 했다.

 

또한 1009년, 고려에서는 강조의 정변이라는 정치적 사건이 발생했다. 강조는 당시 고려의 실권자였던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사건은 고려 내부의 혼란을 야기했으며, 거란은 이를 고려를 침공할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거란은 고려가 내부 분열로 인해 국방력이 약해졌다고 판단하고,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였다.

 

1010년, 거란의 황제 성종(聖宗)은 소배압(蕭排押)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1차 침입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양규의 전략과 전투

거란군은 빠르게 남하하며 개경을 점령했다. 이에 고려의 현종은 수도를 방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판단하고 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된다. 개경은 함락되었고, 거란군은 이를 통해 고려의 굴복을 기대했다. 하지만 고려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이때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반격을 개시했다. 양규는 고려의 주요 장수 중 한 명으로, 특히 유격전과 기습전술에 능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개경이 함락된 이후에도 거란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지속적으로 공격을 감행하며 거란군을 괴롭혔다.

양규의 전략적 전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1. 기습 공격 전술 – 양규는 거란군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하며 혼란을 유발했다. 특히 산악 지형을 이용한 유격전으로 거란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지친 거란군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2. 퇴로 차단 작전 – 양규는 거란군이 개경을 점령한 후 북쪽으로 철수하는 경로를 예측하고, 주요 지점에서 거란군을 막아섰다. 그는 특히 귀주(龜州) 일대에서 거란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며 큰 피해를 입혔다.
  3. 고려군 사기의 고취 – 양규의 적극적인 공격은 고려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수도를 잃고 피난을 떠난 왕과 조정 대신들은 불안에 떨었지만, 양규의 승전 소식이 전해지면서 고려군은 다시 힘을 내어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결국 거란군은 양규의 지속적인 공격과 고려군의 반격을 견디지 못하고 퇴각을 결정하게 된다.


거란의 철수

거란군은 고려의 강한 저항과 양규의 끊임없는 공격에 시달리며 철수를 결심하게 되었다. 특히 귀주에서 양규의 고려군이 거란군을 압박하면서, 거란군의 피해가 더욱 커졌다.

 

결국 거란의 성종은 고려와의 협상을 통해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거란은 개경을 불태우고 철수하면서 고려에 심각한 피해를 남겼지만,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오히려 고려의 저항력이 강하다는 점을 확인하며, 이후의 외교 전략을 변경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거란은 2차 침입을 통해 고려를 복속시키려 했지만 실패했으며, 고려도 이 전쟁을 통해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후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는 체제를 갖추게 된다.


양규의 역사적 평가

양규는 고려의 역사에서 탁월한 전략가이자 용맹한 장수로 평가된다. 그의 공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거란의 2차 침입을 저지한 고려의 영웅 – 양규는 퇴로를 차단하고 기습 공격을 감행하며, 거란군이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2. 기동전과 유격전의 명수 – 그는 정면 전투보다는 게릴라전과 기동전을 활용해, 거란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전략적 타격을 가했다.
  3. 고려군의 사기를 높인 인물 – 양규의 용맹한 전투는 고려군에게 큰 힘이 되었으며, 혼란스러운 국면에서도 고려군이 재정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양규는 거란군이 철수한 후 고려 조정에 의해 억울하게 숙청당한다. 그의 전공을 시기한 일부 대신들이 그를 모함하여 처형되었으며, 이는 고려 역사에서 안타까운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 하지만 후대에 이르러 그의 공적이 인정되었고, 고려를 지킨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다.


결론

거란의 2차 침입은 고려가 강대국 사이에서 자주성을 지키려 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거란은 4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침공했지만, 수도를 일시적으로 점령한 것 외에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양규의 활약으로 인해 거란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쟁을 통해 고려는 국방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으며, 이후 3차 침입에 대비한 방어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또한 양규와 같은 뛰어난 장군의 존재는 고려의 군사력이 결코 약하지 않다는 점을 증명했으며, 거란과의 대립 속에서 고려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FAQ – 거란 2차 침입과 양규의 활약

1. 거란이 고려를 다시 침입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거란은 고려가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또한 1009년 발생한 강조의 정변으로 고려 왕실이 불안정해진 틈을 타, 고려를 압박하고자 침공을 단행했습니다.

 

2. 거란 2차 침입 당시 고려의 대응은 어땠나요?
거란군이 개경을 함락하자, 고려의 현종은 나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고려군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고, 특히 양규가 중심이 되어 거란군의 퇴로를 차단하며 적극적인 반격을 가했습니다.

 

3. 양규가 사용한 주요 전략은 무엇인가요?
양규는 거란군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서 퇴로를 차단하여 거란군을 압박했습니다. 특히 귀주 전투에서 거란군에 큰 타격을 입히며, 결국 거란이 철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4. 거란군은 왜 철수하게 되었나요?
거란군은 개경을 점령했지만, 고려 조정이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고, 양규의 게릴라 전술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면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국 전쟁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거란은 개경을 불태우고 퇴각하게 됩니다.

 

5. 양규의 활약이 고려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양규는 강력한 적군을 상대로 효과적인 전술을 구사하며, 전쟁의 흐름을 뒤집은 영웅으로 평가됩니다. 특히 고려가 거란의 침략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지만, 결정적인 피해를 주어 3차 침입을 대비할 시간을 벌었다는 점에서 그의 공적은 매우 중요합니다.

 

6. 거란 2차 침입 이후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했나요?
거란은 고려를 복속시키는 데 실패했지만, 고려가 여전히 송나라와 친교를 유지하자 이후 1018년 3차 침입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3차 침입에서도 고려의 강력한 저항을 받으며 결국 조공을 받는 선에서 외교적인 타협을 하게 됩니다.

 

7. 양규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나요?
양규는 거란군을 격퇴한 공로가 있었지만, 일부 고려 조정 대신들의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숙청되었습니다. 하지만 후대에 그의 공적이 재평가되었으며, 고려를 지킨 명장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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