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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년(현종 1년), 고려는 거란(요나라)의 2차 침입을 맞아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거란의 대군이 개경을 함락하자, 고려의 왕 **현종(顯宗)**은 수도를 지키는 대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게 된다. 이 사건은 고려 왕실이 직접 전란을 피해 이동한 중요한 사례로, 단순한 왕의 도피가 아니라 국가의 존립과 왕권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었다.
현종의 나주 피난은 당시 고려의 정치적 혼란과 군사적 열세를 보여주는 동시에, 거란의 침입에 대한 고려 조정의 대응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하지만 이 피난이 단순한 후퇴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피난 과정에서 고려 조정은 내부 결속을 다지고, 이후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번 글에서는 현종의 즉위와 정치적 상황, 거란의 침입과 피난 결정, 피난 중 고려 조정의 대응, 그리고 피난 이후 고려의 변화까지, 이 사건이 고려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를 심도 있게 살펴보겠다.
현종의 즉위와 정치
현종은 고려 제8대 왕으로, 1009년 강조의 정변 이후 즉위하게 되었다. 당시 고려의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왕권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강조의 정변(1009년)
고려 제7대 왕인 목종(穆宗)이 신하들의 반발을 사면서 실각했고, 강조(康兆)가 반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왕으로 옹립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변은 고려 내부의 분열을 초래하였고, 거란이 이를 빌미로 고려를 침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위 초기의 정치적 혼란
고려 조정은 여전히 강조의 세력과 기존의 왕실 세력 간의 갈등이 남아 있었으며, 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왕권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또한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문제로 거란과의 충돌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거란의 압박
거란은 고려가 강조의 정변을 일으킨 것 자체가 고려의 불충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주장하며, 현종에게 직접 항복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려 조정은 거란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결국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거란 침입과 피난 결정
거란은 1010년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거란군은 빠르게 개경을 향해 진격했고, 고려군은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후퇴를 거듭했다.
개경 함락과 피난 결정
거란군은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고려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수도 개경을 점령했다. 개경이 함락되면서 왕실과 조정은 패닉 상태에 빠졌고, 현종은 결국 수도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피난을 결정했다.
나주로의 피난 경로
현종은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이동하며,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거쳐 나주(羅州)로 피난하게 된다. 나주는 고려 남부의 중요한 거점 지역으로, 당시 고려 조정이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현종의 피난을 둘러싼 논란
당시 고려 조정 내에서도 왕의 피난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일부 대신들은 수도를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전세가 불리했던 만큼 왕이 안전한 곳에서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는 의견이 더 우세했다. 하지만 후대에는 이 피난이 고려 왕권의 약점을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피난 중 고려 조정의 상황
현종이 피난을 떠난 동안, 고려 조정과 군대는 거란군에 맞서 싸우며 수도를 되찾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양규(楊規)의 활약
거란군이 개경을 점령하고 철수하려는 시점에서, 고려의 장수 양규가 거란군의 퇴로를 차단하며 적극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양규의 군대는 거란군을 기습 공격하며 큰 피해를 입혔고, 이는 결국 거란이 철수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 조정의 내부 결속
수도를 떠나 피난을 간 상황에서도 고려 조정은 행정 체계를 유지하며 국정을 운영했다. 이 과정에서 대신들은 왕권을 유지하고 거란과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방안을 모색했다.
거란과의 협상
거란은 개경을 점령한 뒤 고려의 항복을 요구했으나, 고려 조정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고려의 지속적인 저항과 양규의 반격으로 인해 거란은 철수를 결정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고려는 다시 개경을 회복할 수 있었다.
피난 이후 왕권 강화
현종이 피난에서 돌아온 이후, 고려는 왕권을 강화하고 국방을 재정비하는 데 집중했다.
왕권 강화 조치
피난 과정에서 왕권의 위상이 약화될 수도 있었지만, 현종은 이를 오히려 왕권을 공고히 하는 계기로 삼았다.
조정 내 반대 세력을 정리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향후 외세의 침입에 대비했다.
나성(羅城) 건설
거란의 침입을 겪은 후, 고려는 개경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규모 성벽을 축조하였다.
이 성벽은 이후 고려의 수도 방어 체계를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국방 개혁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군사 조직을 개편하고, 북방 방어선을 더욱 강화했다.
이후 거란의 3차 침입(1018년)에서 고려가 승리하는 데 있어, 이 국방 개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외 관계 조정
고려는 이후 거란과의 외교를 조정하며,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면서도 자주적인 입장을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외교 전략은 고려가 장기적으로 안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결론
현종의 나주 피난은 고려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었다. 거란의 침입에 맞서 수도를 지키지 못한 것은 단기적으로 왕권의 약화를 초래할 수도 있었지만, 피난 중 고려 조정이 내부 결속을 다지고, 이후 왕권 강화와 국방 개혁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고려는 거란의 위협을 극복하고, 이후 더욱 강한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이 사건은 단순한 패배의 기록이 아니라, 고려가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FAQ – 현종의 나주 피난과 고려의 대응
1. 현종이 나주로 피난을 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거란군이 개경을 함락하면서 고려 왕실이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현종은 수도를 방어할 병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국가 존속을 위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2. 나주는 어떤 이유로 피난지로 선택되었나요?
나주는 고려 남부의 중요한 거점 지역이었으며, 거란군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안전한 곳에서 왕권을 유지하며 조정을 운영할 수 있는 장소로 적합했습니다.
3. 피난 중 고려 조정은 어떤 역할을 했나요?
현종이 피난 중에도 고려 조정은 국정을 운영하며 국가 기능을 유지했습니다. 특히 양규 등의 장군들이 거란군을 견제하며 반격을 시도하였고, 결국 거란군은 철수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4. 거란군이 고려에서 철수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무엇인가요?
거란군은 개경을 점령했지만 고려 왕실과 조정이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고, 양규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또한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5. 피난 이후 고려 왕권은 어떻게 변화했나요?
현종은 피난에서 돌아온 후, 왕권을 더욱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조정 내 반대 세력을 정리하고, 국방을 강화하며 수도 개경에 방어 성벽인 나성(羅城)을 축조하는 등 국가 체계를 재정비하였습니다.
6. 나주 피난이 고려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현종의 피난은 단순한 왕의 도피가 아니라, 국가 존립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후 고려는 왕권을 강화하고 거란의 위협을 대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결과적으로 3차 침입(1018년)에서 거란을 완전히 격퇴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7. 고려는 이후 거란의 침입을 어떻게 대비했나요?
고려는 나성(羅城) 건설을 통해 개경 방어력을 강화하였고, 국경 방어선을 정비하며 군사력을 재편성하였습니다. 이러한 대비책 덕분에 1018년 거란의 3차 침입에서 강감찬이 귀주 대첩을 통해 대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https://ekqwlckdrh.tistory.com/531
거란 3차 침입 – 강감찬과 귀주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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