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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려사스토리

거란 3차 침입 – 강감찬과 귀주 대첩

전문가팀 2025. 2. 9.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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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년(현종 9년), 고려와 거란(요나라) 사이에 마지막이자 가장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993년과 1010년에 있었던 1차, 2차 침입에도 불구하고 거란은 고려를 완전히 복속시키는 데 실패했다. 이에 거란은 다시 한 번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였으며, 이 전쟁이 바로 거란의 3차 침입이다.

 

그러나 고려에는 뛰어난 명장이 있었다. 바로 강감찬(姜邯贊)이다. 그는 지휘관으로서 철저한 전략과 방어전술을 펼치며 거란군을 압박했고, 결국 귀주 대첩(龜州大捷)에서 고려군의 대승리를 이끌어냈다. 이 승리는 고려가 거란의 위협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고려와 거란의 외교 관계도 변화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거란 3차 침입의 배경과 전개 과정, 그리고 귀주 대첩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며, 이 전쟁이 고려 역사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자세히 알아보겠다.

 

 

 

거란 3차 침입 배경

거란이 다시 고려를 침입한 이유는 고려가 끝까지 거란의 조공 요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1차 침입(993년) 당시, 서희의 담판으로 전쟁 없이 강동 6주를 획득한 고려는 이후에도 거란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거란은 여전히 고려를 완전히 지배하려 했으며, 2차 침입(1010년)에서 개경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특히 고려가 송나라와의 친교를 지속적으로 유지한 점이 거란을 자극했다. 거란은 고려가 자신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송과의 관계를 끊기를 원했지만, 고려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거란의 황제 성종(聖宗)은 1018년, 소배압(蕭排押)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도록 명령했다.

 

거란은 이번 3차 침입에서 고려를 완전히 복속시키려 했으며, 더욱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고려는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강력한 방어 체계를 구축했고, 그 중심에는 강감찬이 있었다.


강감찬의 전략

강감찬은 고려의 명장으로, 1018년 거란이 침입하자 현종의 명을 받아 고려군을 총지휘하게 된다. 그는 거란군을 상대하기 위해 철저한 방어 전략을 세웠으며, 주요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1. 적군을 고려 깊숙이 유인하는 전략 – 강감찬은 거란군이 한 번에 수도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국경을 열어 적군을 내륙 깊숙이 끌어들였다. 이렇게 하면 거란군의 보급선이 길어져 약점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2. 기습과 역습을 통한 타격 – 고려군은 정면 대결보다는 기습과 역습을 통해 거란군을 계속 괴롭혔다. 특히 거란군이 피로해진 시점을 노려 집중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3. 철저한 방어선 구축 – 강감찬은 주요 지점마다 방어선을 구축하여, 거란군이 이동하는 경로를 차단했다. 이를 통해 적군의 퇴로를 막고, 효과적으로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4. 지형을 활용한 전투 – 고려는 산악 지형이 많아 기병 중심의 거란군이 기동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강감찬은 이를 활용하여 거란군을 험한 지형으로 유도한 뒤, 매복 공격을 가했다.

이러한 전략을 바탕으로, 고려군은 거란군이 무리하게 전진하도록 만들었고, 결국 귀주에서 결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귀주 대첩의 전개

귀주 대첩은 고려와 거란의 3차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1. 거란군의 혼란 – 거란군은 고려 내륙 깊숙이 진격했지만, 계속되는 고려군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또한 보급선이 차단되면서 군사들이 굶주리고 사기가 저하되었다.
  2. 강감찬의 반격 시작 – 고려군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쫓아가며 공격을 감행했다. 특히 귀주에서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으며, 강감찬은 거란군이 도망칠 수 없도록 완벽한 포위망을 구축했다.
  3. 압도적인 승리 – 고려군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포위한 후 기병과 보병을 동원하여 전방위 공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거란군의 절반 이상이 전사했으며, 나머지 병력도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4. 거란군의 철수 – 결국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은 살아남은 병력을 이끌고 황급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군은 마지막까지 추격전을 벌이며 거란군을 괴멸시켰다.

귀주 대첩은 고려 역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 중 하나로 기록되며, 이후 고려와 거란의 관계를 완전히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 이후 고려의 변화

귀주 대첩 이후 고려는 거란의 침략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되었다. 강감찬의 승리로 거란은 고려를 정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결국 고려와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게 된다.

  1. 강화된 고려의 자주성 – 고려는 거란의 요구를 더 이상 들어줄 필요가 없었으며,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도 유지할 수 있었다.
  2. 나성(羅城)의 건설 – 고려는 향후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개경 주변에 대규모 방어 성벽인 나성을 쌓았다. 이를 통해 국방력을 한층 더 강화했다.
  3. 고려-거란의 평화 체제 구축 –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공격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이후 외교적인 타협을 통해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4. 강감찬의 역사적 위상 – 귀주 대첩의 영웅 강감찬은 이후 고려 역사에서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그의 승리는 고려가 독립적인 국가로서 자주성을 지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결론

거란의 3차 침입은 고려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전쟁이었다. 거란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고려를 정복하려 했지만, 강감찬의 전략과 고려군의 저항으로 인해 결국 패배하고 철수했다. 특히 귀주 대첩은 고려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로 평가되며, 이후 고려와 거란의 관계를 평화적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쟁을 통해 고려는 더욱 강한 국가로 거듭났으며, 자주적인 외교 정책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강감찬과 고려군이 이룬 귀주 대첩의 승리는 고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FAQ – 거란 3차 침입과 귀주 대첩

1. 거란이 고려를 3차 침입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거란은 고려가 여전히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또한 1차, 2차 침입에서도 고려를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1018년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마지막으로 고려를 정복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2. 강감찬은 어떤 전략으로 거란군을 상대했나요?
강감찬은 거란군을 고려 내륙 깊숙이 유인한 뒤, 지속적으로 기습 공격을 가해 적군을 지치게 했습니다. 또한 귀주에서 결정적인 포위망을 구축하여 거란군을 섬멸하는 전략을 펼쳤습니다.

 

3. 귀주 대첩에서 고려군이 거둔 승리는 어느 정도였나요?
귀주 대첩에서 고려군은 거란군을 완벽히 포위한 후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 결과 거란군의 절반 이상이 전사했고, 살아남은 병력도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결국 거란군은 대패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4. 거란 3차 침입 이후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했나요?
귀주 대첩에서 대패한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공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후 고려와 거란은 외교적인 타협을 통해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고려는 자주적인 외교 노선을 확립하게 됩니다.

 

5. 고려는 이후 외세의 침입을 대비해 어떤 조치를 취했나요?
거란의 침입을 겪은 고려는 수도 개경을 방어하기 위해 대규모 방어 성벽인 나성(羅城)을 건설했습니다. 또한 국경 방어 체계를 더욱 강화하여 이후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6. 강감찬은 고려 역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나요?
강감찬은 귀주 대첩에서 거란군을 섬멸하며 고려를 지켜낸 위대한 명장으로 평가됩니다. 그의 승리는 고려가 강대국 사이에서도 독립적인 국가로 살아남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고려 사회에서 중요한 영웅으로 기억되었습니다.

 

7. 귀주 대첩이 고려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귀주 대첩은 고려가 거란의 위협을 완전히 종식시킨 결정적인 전투였습니다. 이 승리로 인해 고려는 거란의 침략에서 벗어나 국력을 키울 수 있었으며, 이후 동북아시아 국제 정세에서 더욱 주체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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