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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년, 거란족(契丹)의 요나라(遼)가 발해를 멸망시키면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는 크게 변화했다. 요나라는 발해 지역을 차지한 후 거란식 통치를 실시하고, 발해 유민들을 강제 이주시켜 지배 체제를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발해의 독자적인 문화가 점차 소멸했고, 많은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하면서 고려와 요나라의 관계는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① 거란족의 발해 지배 정책과 통치 방식, ② 발해 문화의 소멸과 거란화(契丹化) 과정, ③ 고려와 요나라의 충돌과 발해 유민 문제를 중심으로 발해 멸망 이후의 변화와 그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겠다.
거란족의 발해 지배 정책과 통치 방식
1. 요나라의 발해 정복과 초기 통치
926년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를 점령했다.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大諲譔)은 요나라에 항복하였고, 발해 왕족과 귀족들은 대부분 포로로 끌려갔다.
요나라는 발해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행정 기구를 정비하고, 발해의 지배층을 대체하려 했다.
2. 동단국(東丹國)의 설치
요나라는 발해 유민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동단국(東丹國, 926~936)을 세웠다.
동단국은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지역에 설치되었으며, 요나라의 황족 야율배(耶律倍)가 국왕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발해 유민들을 완전히 거란화하기 위한 중간 단계였지만, 발해 유민들의 반발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936년 폐지되었다.
3. 강제 이주 정책과 거란식 통치
요나라는 발해 유민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강제 이주 정책을 시행했다.
많은 발해 유민들이 요나라의 수도 연경(燕京, 현재 베이징)과 내몽골 지역으로 이주당했다.
요나라의 지배층은 발해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대신 거란 귀족들이 주요 관직을 차지하도록 했다.
이후 발해 지역은 요나라의 5경(五京) 체제 중 동경(東京)으로 편입되었으며, 거란의 군사적·행정적 지배가 강화되었다.
발해 문화의 소멸과 거란화(契丹化) 과정
1. 발해의 행정 조직 해체
요나라는 발해의 독립적인 행정 체계를 폐지하고, 거란식 군사·행정 제도를 도입했다.
발해 귀족들은 요나라의 관료 체계에 편입되었으나, 대부분 낮은 직위에 머물렀다.
2. 거란식 문화 강요와 발해 정체성 약화
요나라는 발해 유민들에게 거란식 의복과 생활 방식을 강요하며 동화 정책을 시행했다.
발해의 불교 사찰과 유교 교육 기관들이 점차 사라지고, 거란식 종교와 풍습이 강요되었다.
거란 문자가 사용되면서, 발해의 한자 중심 행정 체계가 약화되었다.
3. 발해인의 저항과 반란
일부 발해 유민들은 요나라의 강압적인 지배에 반발하여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10세기 후반, 발해 유민들이 중심이 된 정안국(定安國, 10세기 말~11세기 초)이 등장하여 요나라에 저항했으나, 결국 요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이러한 반란들은 요나라의 강력한 군사력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이후 발해 문화는 점차 소멸해 갔다.
고려와 요나라의 충돌과 발해 유민 문제
1. 고려의 발해 유민 수용 정책
고려 태조 왕건(王建, 재위 918~943)은 발해 멸망 이후 많은 발해 유민들을 고려로 받아들였다.
934년, 발해 왕족 대광현(大光顯)이 고려로 망명하였으며, 왕건은 그를 후대하고 발해 유민들에게 거주지를 마련해 주었다.
고려는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고구려-발해 계승국"임을 강조했다.
2. 고려와 요나라의 외교적 긴장
고려는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 유민들을 강제 지배하는 것에 반발했다.
요나라는 고려가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했으며, 이는 고려와 요나라 간의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원인이 되었다.
10세기 후반,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 외교적 갈등이 발생했고, 결국 11세기 초 거란의 고려 침공(거란의 1차 침입, 993년)이 발발하게 된다.
3. 고려와 요나라의 군사적 충돌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긴장은 10세기 후반부터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다.
고려는 요나라의 압박에 맞서 서희의 외교 전략(강동 6주 확보)을 통해 국경을 방어했다.
고려와 요나라의 갈등은 이후 거란의 2·3차 침입(1010년, 1018년)으로 확대되었으며, 고려는 강력한 저항을 통해 요나라의 침략을 막아냈다.
결론
발해 멸망 후 요나라의 지배는 강제 이주 정책과 거란식 동화 정책을 통해 발해의 독립적인 문화를 점차 소멸시키는 과정이었다.
요나라는 발해 유민들을 강제 이주시켜 거란식 통치를 강화했으며, 발해 문화는 점점 사라졌다.
하지만 일부 발해 유민들은 요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정안국과 같은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많은 발해 유민들은 고려로 망명하였으며, 고려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발해 계승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로 인해 고려와 요나라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으며, 결국 10~11세기 거란과 고려의 군사적 충돌(거란의 침입)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https://ekqwlckdrh.tistory.com/856
고려로 망명한 발해 유민과 고려 사회에서의 역할
926년 요나라(거란)의 침공으로 발해가 멸망한 후, 많은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했다. 고려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고구려-발해의 계승국"임을 강조했다. 발해 유민들은 고려 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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