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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발해+후삼국 스토리

요나라의 발해 멸망 (926년), 거란족 침공과 발해의 붕괴

전문가팀 2025. 3. 2.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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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渤海)는 698년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한 이후 200여 년간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번영을 누렸지만, 926년 거란족(契丹)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발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거란의 공격과 수도 상경(上京) 함락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왕권 약화와 귀족 간의 분열, 외교적 고립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번 글에서는 ① 거란족(요나라)의 발해 침공 과정, ② 수도 상경 함락과 발해의 붕괴, ③ 발해 멸망의 원인과 그 이후의 역사적 영향을 중심으로 발해 멸망의 과정과 그 의미를 살펴보겠다.

 


거란족(요나라)의 발해 침공

거란족은 중국 동북부와 몽골 초원 지역에서 활동하던 유목 민족으로, 10세기 초 강력한 지도자인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요 태조)가 등장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1. 거란의 세력 확장과 발해 견제

916년, 야율아보기는 거란을 통일하고 요나라(遼, Liao Dynasty)를 건국했다.

요나라는 발해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며, 발해를 주요 정복 대상으로 삼았다.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정복하여 만주와 한반도 북부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2. 발해의 외교적 고립

발해는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외교적 후원자를 잃었다.

신라와는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으며, 일본과의 교류도 군사적 지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반면, 거란은 발해의 내부 분열과 약점을 파악하고 침공을 준비했다.

3. 거란의 발해 침공 개시 (925년)

925년 겨울, 거란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발해를 침공했다.

발해군은 방어전을 펼쳤지만, 거란의 기병 중심 전술에 밀려 주요 거점들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수도 상경 함락과 발해의 붕괴

1. 거란군의 공세와 발해의 저항

926년, 거란군은 발해의 수도 상경(上京, 현재 중국 지린성 동경성)으로 진격했다.

발해군은 수도 방어에 나섰으나, 왕실과 귀족 세력 간의 분열로 인해 효과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다.

거란군은 강력한 기병 전술과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발해군을 격파하며 수도를 포위했다.

2. 발해 왕실의 항복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大諲譔)은 끝까지 저항하지 못하고 거란에 항복했다.

이는 발해 내부에서 왕권이 약화되었으며, 군사적 대응 능력이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대인선과 왕족, 귀족들은 거란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요나라로 끌려갔다.

3. 상경성 함락과 발해의 멸망

926년, 수도 상경성이 함락되면서 발해는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거란은 발해를 완전히 점령한 후, 발해의 귀족과 백성들을 강제로 요나라의 지배 아래 두었다.


발해 멸망의 원인과 그 이후

1. 발해 멸망의 원인

(1) 거란의 강력한 군사력

거란군은 기병 중심의 유목 전술을 사용하여 빠르고 강력한 공격을 펼쳤다.

발해군은 이러한 기동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연이어 패배했다.

(2) 왕권 약화와 내부 분열

발해 후기에 들어 왕권이 약화되었고, 귀족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었다.

특히, 마지막 왕 대인선은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으며, 국가 위기 속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3) 외교적 고립

발해는 당나라의 붕괴 이후 외교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국가가 없었다.

신라와의 관계는 원활하지 않았고, 일본과의 외교도 군사적 지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4) 경제적·군사적 피로

발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며 여러 민족을 통합해야 했고, 지속적인 국경 방어전으로 인해 국가의 군사적·경제적 부담이 증가했다.

요나라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만한 군사력과 자원이 부족했다.


2. 발해 멸망 이후의 역사적 영향

(1) 요나라의 동북아시아 지배 확립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까지 영향력을 확장했다.

발해의 상경 지역은 요나라의 동단국(東丹國)이라는 행정 구역으로 편입되었다.

(2) 발해 유민들의 저항과 독립 운동

발해 멸망 이후에도 일부 발해 유민들은 거란의 지배에 저항했다.

927년, 발해의 왕족이었던 대광현(大光顯)은 일부 유민을 이끌고 남하하여 고려로 망명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발해의 후계국"임을 강조하며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3) 발해 후계 국가들의 등장

발해 멸망 후, 일부 발해 유민들은 요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새로운 독립 국가를 세우려 했다.

정안국(定安國, 10세기 말~11세기 초)은 발해 유민들이 세운 국가로, 요나라와 일정 기간 대립했다.

그러나 이들 후계국들은 요나라의 강력한 군사력 앞에서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멸망했다.


결론

926년 요나라(거란족)에 의해 발해가 멸망한 것은 군사적 침공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정치적·외교적 문제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거란군의 강력한 군사력과 기병 전술에 의해 발해는 효과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다. 왕권 약화와 귀족 간의 분열로 인해 국력이 쇠퇴했고, 외교적으로도 고립되었다. 발해 멸망 후에도 유민들은 고려로 망명하거나 저항 세력을 형성하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발해 멸망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후 고려가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역사적 연속성을 유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발해 문왕의 당나라 친선 외교와 문화적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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