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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발해+후삼국 스토리

발해와 거란(요)의 관계 및 발해 멸망의 원인

전문가팀 2025. 3. 1.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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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와 거란(契丹)의 관계는 단순한 대립 관계가 아니라, 교류와 충돌이 반복된 복합적인 관계였다.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북방의 유목 민족들과 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반면, 거란족은 10세기 초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발해의 북서쪽을 위협했고, 결국 926년 요(遼)나라(거란)가 발해를 멸망시켰다.

 

발해와 거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① 거란족의 침입과 발해의 대응, ② 발해 멸망의 원인, ③ 요나라의 성장과 발해의 흡수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란족의 침입과 발해의 대응

거란족은 중국 동북부 지역(현재의 랴오닝성, 내몽골 자치구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 민족으로, 4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주요 세력 중 하나였다. 발해와 거란은 건국 초기부터 서로를 경계하며 복잡한 관계를 형성했다.

1. 초기의 거란과 발해의 관계

발해는 무왕(武王, 재위 719~737) 시기에 거란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며 북방 정책을 펼쳤다.

이는 발해가 당시 거란 세력을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9세기 이후 거란 세력이 점점 강대해지면서 발해를 위협하는 존재로 변모했다.

2. 거란족의 성장과 발해의 긴장

8~9세기 동안 거란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점차 통합되어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다.

10세기 초, 거란족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요 태조)가 등장하면서 거란은 더욱 강성해졌다.

발해는 거란과의 대립을 피하려 했으나, 거란족은 발해의 영토를 탐내며 계속해서 압박했다.

3. 거란족의 본격적인 침입

925년, 거란의 초대 황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했다.

발해의 수도 상경성(上京城)은 강력한 방어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내부적인 분열과 지배층의 혼란으로 인해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했다. 결국 926년 발해는 거란에 의해 멸망했다.


발해 멸망의 원인

발해는 926년 거란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는데, 이는 단순히 외부의 침입 때문만이 아니라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1. 내부적 요인: 왕권 약화와 귀족 세력의 분열

9세기 후반부터 발해의 왕권은 점점 약화되었으며, 귀족 간의 권력 다툼이 심해졌다.

특히 발해 후기 왕들은 즉위 후 단명하는 경우가 많아,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왕위 계승 과정에서 정통성이 약한 군주들이 등장하면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2. 경제적 문제와 군사력 약화

발해는 넓은 영토를 유지해야 했고, 이를 위해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경제적 부담과 지방 세력의 독립성 강화로 인해 중앙의 군사력이 약해졌다.

거란의 공격이 시작될 당시 발해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고, 방어선을 유지하지 못했다.

3. 외교적 고립

발해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외교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외교적 지원을 잃었다.

일본과의 외교 관계도 유지되었지만, 일본은 발해를 직접적으로 군사적으로 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신라와의 관계도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신라는 발해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개입하지 않았다.

4. 거란의 강력한 군사력

거란은 야율아보기를 중심으로 강력한 기병 부대를 조직하여 발해를 공격했다.

발해군은 초반에는 저항했지만, 수도 상경성이 함락되면서 왕족과 귀족들은 항복하거나 도망쳤다.


요나라의 성장과 발해의 흡수 과정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은 이후 요나라(遼, 916~1125)를 세우고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1. 야율아보기의 국가 건설

야율아보기는 거란족을 통합한 후, 916년 요나라를 건국했다.

그는 유목 민족과 정착 농경민을 아우르는 이중 행정 체제(北南面官制)를 도입하여 국가 체제를 강화했다.

2. 발해 멸망 후 발해 유민 통합

발해 멸망 후, 일부 발해 유민들은 요나라에 흡수되어 관리로 기용되거나 거란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발해 유민들은 요나라의 관료 체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문관(文官) 계층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일부 발해 유민들은 요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고려로 망명하거나 동진국(東丹國)이라는 독립 세력을 형성했다.

3. 동진국(東丹國)의 등장과 실패

거란은 발해 유민을 통치하기 위해 **동진국(東丹國)**이라는 괴뢰 정권을 세웠다.

하지만 동진국은 발해 유민들의 저항과 내부적인 불안정으로 인해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결국 요나라에 흡수되었다.

4. 고려로 망명한 발해 유민

발해가 멸망한 후, 많은 발해 유민들이 고려(高麗)로 망명했다.

고려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발해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한반도와 만주의 문화적 연속성을 유지했다.


결론

발해와 거란의 관계는 초반에는 대립적이었지만, 10세기에 접어들면서 거란이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발해를 정복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926년 발해는 거란의 공격으로 멸망했으며, 이는 내부적 분열과 외교적 고립, 군사력 약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후 요나라가 성장하면서 발해 유민들은 요나라에 흡수되거나 고려로 망명하면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국가로 통합되었다.

발해의 멸망은 단순한 한 국가의 종말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 질서가 변화하는 중요한 계기였으며, 고려가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한반도와 만주의 문화적 연속성이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https://ekqwlckdrh.tistory.com/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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