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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698년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기반으로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한 국가로, 초기부터 주변 국가들과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당나라(唐)는 발해를 자국의 속국으로 편입하려 했으며, 이는 발해와 당나라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발해는 한편으로는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적으로 대립하며 독립적인 세력을 키워갔다.
특히, 발해의 제2대 왕 무왕(武王, 대무예)은 강력한 대외 확장 정책을 펼치며 당나라를 견제했고,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무왕은 북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한편, 당나라와 신라를 압박하며 동북아시아에서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당나라는 이에 대응하여 발해를 공격하거나 외교적으로 견제하는 전략을 사용했지만, 발해는 이에 굴하지 않고 강한 독립성을 유지했다.
이번 글에서는 ① 발해-당 전쟁, ② 무왕의 북방 확장, ③ 당나라의 발해 견제를 중심으로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를 상세히 살펴보겠다.
발해-당 전쟁
발해와 당나라의 전쟁은 주로 무왕(武王, 재위 719~737년) 시기에 집중되었으며, 이후에도 긴장 관계가 지속되었다.
1. 발해와 당나라의 초기 관계
발해 건국 초기, 대조영은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실리 외교를 펼쳤다.
713년, 당나라 현종(玄宗)은 발해를 "홀한주도독부(忽汗州都督府)"로 책봉하고 대조영을 도독(都督)으로 임명했으나, 이는 발해를 속국으로 간주한 것이었고 대조영은 이를 실질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무왕 즉위 후, 발해는 당나라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강화하며 전쟁을 준비했다.
2. 727년 발해의 요서 공격
무왕은 727년 요서 지방(遼西, 현재 중국 랴오닝성 서부)을 공격하여 당나라와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발해는 말갈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의 변방 지역을 공격했으며, 이는 당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나라는 즉각 대응하여 군대를 동원하였지만, 발해의 기습적인 공격에 크게 타격을 입었다.
3. 732년 발해의 산둥 반도 공격
발해는 732년에는 당나라의 산둥(山東) 지역을 공격하여 등주(登州)를 습격했다.
이 공격은 발해의 해상 군사력과 전략적 기동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발해가 육로뿐만 아니라 해로를 통해서도 당나라를 견제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는 이후 반격을 준비했지만, 발해는 재빨리 퇴각하여 피해를 최소화했다.
4. 당나라의 반격과 외교적 견제
당나라는 발해의 공격에 대응하여 신라와 흑수말갈(黑水靺鞨) 세력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하려 했다.
특히 733년,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당나라는 발해와의 직접적인 대결보다는 외교적인 견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무왕의 북방 확장
무왕은 단순히 당나라를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북방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발해의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1. 북만주와 연해주 지역 확장
무왕은 북방 말갈(靺鞨) 세력을 정복하고, 현재의 러시아 연해주 지역까지 발해의 영토를 확장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한반도 및 중국 동북부 국가가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에 걸친 강국이었음을 의미한다.
2. 거란과의 관계
무왕은 당시 강력한 유목 민족이었던 거란(契丹)과도 대립했다.
발해는 거란의 남하를 막기 위해 군사적인 대응을 했으며, 이는 후일 발해가 거란과 지속적으로 충돌하는 계기가 되었다.
3. 동해 연안과 일본과의 관계 강화
무왕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여 당나라와 신라를 견제하려 했다.
일본과는 사신을 주고받으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는 발해가 국제적인 외교 네트워크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당나라의 발해 견제
당나라는 발해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사용했다.
1. 신라와의 연합
당나라는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발해를 압박하려 했다.
그러나 신라는 발해와도 일정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려 했고, 당나라의 의도대로 완전히 협력하지는 않았다.
2. 흑수말갈(黑水靺鞨) 지원
당나라는 발해 북쪽에 있던 흑수말갈을 지원하여 발해를 견제하려 했다.
733년 당나라는 흑수말갈과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하려 했으나, 무왕의 군사적 대응으로 실패했다.
이후 발해는 흑수말갈을 제압하고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3. 외교적 압박
당나라는 발해를 '발해국(渤海國)'으로 인정하지 않고 '홀한주도독부'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며 발해를 지방 세력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일본 등 주변 국가들과 발해의 외교 관계를 차단하려 했으나, 발해는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독립성을 더욱 강화했다.
4. 군사적 견제
당나라는 직접적인 전쟁보다는 주변 세력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러나 발해의 군사력이 강력했고, 무왕 사후에도 발해는 당나라의 영향력을 크게 받지 않았다.
결론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는 단순한 우호 관계가 아니라, 강대국 간의 대립과 견제 속에서 형성된 복잡한 외교적·군사적 관계였다.
특히 무왕 시기 발해는 적극적인 군사 확장을 통해 당나라에 맞섰으며, 요서 및 산둥 지역을 공격하는 등 강력한 군사력을 과시했다.
당나라는 신라 및 흑수말갈을 이용해 발해를 견제하려 했으나, 발해의 성장과 독립성을 막지는 못했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도 발해는 일본 등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며 국제적인 독립 국가로서 입지를 확립했다.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변화했으며, 문왕(文王) 시기에는 보다 유화적인 관계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무왕 시기의 발해-당 전쟁은 발해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독립적인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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