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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발해+후삼국 스토리

동모산 – 발해 초기 수도의 전략적 중요성

전문가팀 2025. 3. 1.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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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모산(東牟山)은 698년 대조영(大祚榮)이 발해를 건국한 후, 초기 수도로 삼은 전략적 요충지이다. 발해는 고구려 멸망 이후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성장한 국가였기 때문에, 수도 선정에서 군사적 방어력과 지리적 이점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했다. 동모산은 이러한 요구를 충족하는 천연 요새이자 산성 도시로, 발해의 초석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글에서는 동모산의 산성 도시 구조, 요동 지역과의 관계,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중심으로 동모산의 전략적 중요성을 분석한다.

 


1. 동모산 – 발해의 초대 수도

1) 동모산의 위치

동모산은 오늘날 중국 길림성 돈화(敦化)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리적으로는 송화강 상류 근처의 험준한 산악 지역으로, 발해 건국 당시의 수도로서 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2) 대조영의 수도 선정 배경

698년, 대조영은 천문령 전투(天門嶺 戰鬪)에서 당나라 군대를 격파한 후,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해야 했다.

 

대조영이 수도를 동모산으로 정한 이유

군사적 방어에 유리한 자연 요새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안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환경

요동 지역 및 북방 민족과의 연결이 용이한 전략적 위치

 

따라서 동모산은 발해의 초대 수도로서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2. 산성 도시 – 천연 요새의 역할

1) 동모산의 성곽 구조

동모산은 자연 지형을 활용한 산성(山城) 도시로, 고구려와 발해의 전형적인 방어 도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산을 따라 성곽을 구축하고, 주요 지점에 방어 시설을 배치하여 외부의 침입을 막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국내성(國內城)과 유사한 특징을 가지며, 발해가 고구려의 도시 건설 방식을 계승했음을 보여준다.

2) 주요 방어 시설

동모산은 높은 산악 지형을 활용하여 적의 공격을 차단할 수 있는 방어 체계를 갖추었다.

 

주요 방어 시설

천연 절벽과 강을 이용한 자연 방어선 구축

목책(木柵)과 석축(石築) 성곽을 조성하여 성벽을 강화

중앙 궁궐과 행정 중심지를 성벽 안쪽에 배치하여 방어력을 극대화

 

이러한 방어 시설 덕분에 발해는 초기 국가 형성 과정에서 외부 세력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다.

3) 군사적 방어력

동모산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연합군이 주둔할 수 있는 천연 요새로, 발해 건국 초기의 방어 거점 역할을 하였다.

동모산이 수도였던 시기, 발해는 당나라 및 거란과 대립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안전한 방어체계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동모산은 발해의 수도로서 군사적 중심지 기능을 수행하며, 국가 안정화에 기여하였다.


3. 요동 지역과의 관계

1) 요동 지역과의 전략적 연계

동모산은 요동 지역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는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요동 지역은 발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당나라와의 전쟁 및 신라와의 관계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모산은 요동 지역을 견제하면서도, 서쪽으로 확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2) 당나라와의 군사적 대립

발해 건국 초기, 당나라는 발해를 당의 지방 세력으로 편입하려 하였고, 이에 따라 군사적 충돌이 지속되었다.

동모산은 이러한 대립 속에서 발해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발해는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개선하며, 요동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3) 북방 민족과의 외교 관계

동모산은 북쪽의 흑수말갈(黑水靺鞨) 및 돌궐(突厥)과 교류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발해는 초기에 말갈족과 협력하여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이후 북방 민족을 포섭하여 다민족 국가로 성장하였다.

동모산은 이러한 외교 전략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군사적·행정적 거점이었다.


4. 방어에 유리한 지형

1) 산악 지역에 위치한 천연 요새

동모산은 높은 산악 지역에 위치하여, 외부 침입이 어려운 자연 요새였다.

이러한 입지는 발해가 건국 초기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수도를 방어하는 데 큰 이점이 되었다.

또한, 주변에 강과 숲이 많아, 자급자족이 가능하여 장기적인 방어전에도 유리한 환경이었다.

2) 교통로의 요충지

동모산은 발해 내부의 여러 지역과 연결되는 중심 교통로에 위치하였다.

이곳에서 요동, 연해주, 한반도 북부 등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교통망은 발해가 성장하면서 정치·경제·군사적 중심지를 이동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3) 기후와 생태적 조건

동모산 지역은 농경과 목축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어, 발해 초기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송화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에서 농업이 발달하여, 수도로서의 경제적 기능도 수행할 수 있었다.


5. 수도 이전 – 상경 용천부로의 이동

1)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로의 천도

발해는 국가가 안정화되고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수도를 상경 용천부로 이전하였다.

상경 용천부는 당나라의 장안성을 본떠 건설된 대규모 도시로, 발해의 정치·경제·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2) 수도 이전의 의미

동모산은 발해 건국 초기 방어를 위한 수도였지만, 이후 발해가 대외 교류와 행정 운영을 강화하기 위해 더 넓고 평탄한 지역으로 수도를 이전한 것이다.

하지만 동모산은 이후에도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며, 발해의 북방 방어선 역할을 수행하였다.


결론

동모산은 발해 건국 초기에 수도로 사용된 전략적 요충지로, 군사적 방어, 요동 지역과의 연계, 천연 요새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산성 도시로서 방어력이 뛰어나, 발해의 초반 안정화에 기여.요동 지역과 연결되는 전략적 위치로, 대외 확장과 방어 거점 역할을 수행. 방어에 유리한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당나라와의 대립 속에서 독립을 유지.

이후 수도가 상경 용천부로 이전되면서도, 동모산은 발해의 군사적·정치적 요충지로 계속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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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건국(698년) – 고구려 계승과 독립 국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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