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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도깨비의 [김신]의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 : 김신, 윤관, 척준경, 경대승

전문가팀 2023. 8. 23.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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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드라마 '도깨비'의 김신 역할의 모티브가 된 인물에 대해 알아보면, 실제로 그와 유사한 역사적 인물은 없습니다. 드라마에서의 김신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창작된 가상의 인물입니다.

하지만, 1100년대 중반 고려시대에는 실제로 '김신(金信)'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김신은 여몽 연합군에 참가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배치되어 싸웠으며, 승전 후 방패를 놓은 채 죽기를 바랐습니다.

또한, 1135년 묘청·조광 등이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하고 서경(西京)을 본거지로 난을 일으켰을 때, 김신은 묘청일파의 승선(承宣)이 되어 서북면병마사 이중병(李仲幷)과 각 성을 지키던 신하들을 서경에 있는 염고(鹽庫)에 잡아가두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듬해 김부식(金富軾)을 도원수로 한 토벌군에 의해 잡혀 처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실제 역사적 사실과 드라마 속 김신의 내용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도깨비'의 김신은 영원한 삶을 사는 도깨비로서 살아가며, 면목이 없는 인간들을 돕는 등 판타지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도깨비'의 김신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고, 드라마 속 가상의 인물로써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여 역사 속 인물과의 매칭을 생각한다면 김신(金信), 윤관 (尹瓘), 척준경 (拓俊京), 경대승 (慶大升) 등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는데 각 인물들의 일대기나 활동 사항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2. 김신(金信)


고려 후기에, 평리, 전첨의, 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충숙왕은 해주에서 사냥을 하려 하였으나 조정의 반대를 염려하였다. 그런데 김신이 1335(충숙왕 후 4)에 어향사(御香使)로 고려에 왔다. 그는 충렬왕의 뜻에 영합하여 고려 국왕이 해주신광사(神光寺)에서 장수할 것을 축원해야 한다는 원나라 황제의 명령을 구두로 선포하였다. 왕은 이 성지를 빙자하여 사냥할 수 있게 하였다.

1352년(공민왕 1)에는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에 임명되었고, 1354년에는 평리(評理)를 역임하였다. 1355년에는 전첨의(前僉議)로서 찬성사(贊成事) 박수년(朴壽年)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다. 벼슬이 승지(承旨)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3. 윤관 (尹瓘)


고려 전기에, 동지추밀원사, 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윤관은 고려전기 동지추밀원사, 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111년(예종 6)에 사망했다. 문종·숙종 시기 고려는 여진 정벌을 도모하다가 오히려 크게 참패당했을 정도로 여진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윤관은 패전 경험을 토대로 여진의 기병에 대항할 별무반을 창설하여 대비했고 예종 때 정벌을 개시하여 9성을 축조하고 남도지방 사람들을 이주시켜 살게 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여진의 적극적인 강화 요청과 9성 관리의 어려움을 들어 반환을 결정하면서 윤관은 문신들의 시기와 모함 속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4. 척준경 (拓俊京)


고려전기 이부상서 참지정사, 문하시랑 판병부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척준경은 고려전기 이부상서 참지정사, 문하시랑 판병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144년(인종 22)에 사망했다. 가난하여 학문을 닦지 못하고 무뢰배들과 교유하다가 후에 숙종으로 즉위한 계림군의 종자로 들어가 무관의 길을 걸었다. 윤관을 따라 동여진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인종의 묵인 아래 이자겸 제거 거사가 일어나자 이자겸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궁궐을 불사르고 진압했다. 이후 인종의 설득으로 이자겸 제거에 앞장섰고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인종이 그 공로를 인정하여 복권시켰으나 얼마 후 사망했다.

 

 


5. 경대승 (慶大升)


고려 후기에, 교위, 사심관, 장군 등을 역임한 무신.

일찍이 큰뜻을 품고 가산을 돌보지 않았으며, 아버지 경진(慶珍)이 불법으로 탈취한 토지의 전안(田案)을 선군(選軍)에 바치고 하나도 취하지 않아 청백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15세에 음서(蔭敍)로 교위(校尉)에 임명된 뒤 차차 벼슬이 올라 장군이 되었다.

1178년(명종 8)에 개경에서 살다가 낙향한 청주 출신 사람들과 원래 청주인(원주민) 사이에 분쟁이 생겨 100여 명이 죽게 되자 박순필(朴純弼)과 함께 사심관(事審官)으로 파견되었으나, 그 일을 해결하지 못했다 하여 파면되었다.

1179년 평소 불만이 많던 집권 무신 정중부(鄭仲夫) 일파를 제거하고자 결심하고, 견룡(牽龍) 허승(許升) 등과 모의하여 정중부와 그의 아들인 정균(鄭筠)과 송유인(宋有仁)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집권 무신이 된 뒤에는 종전의 최고권력기구 기능을 하던 중방(重房)의 존재를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사적 집단인 도방(都房)을 두어 정권유지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했으나 관리등용에는 문무신을 고루 기용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아 여러 무신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하여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경대승을 도와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는 데 공이 컸던 허승과 김광립(金光立)을 제거하였으며, 1181년에는 대정(隊正)을 지낸 한신충(韓信忠) · 채인정(蔡仁靖) · 박돈순(朴敦純)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섬으로 귀양을 보내기도 하였다.

경대승은 유언비어라 할지라도 잡아가두고 국문(鞠問)하는 등 형벌이 무자비했다. 집권 동안 도방의 무리라 일컫는 도둑이 횡행하고, 잦은 민란이 발생하는 등 사회가 어지러웠으며, 1183년 집권 5년여 만에 30세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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