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국조선사스토리

조선의 마지막 군주, 고종 (재위 1863~1907) 즉위와 대한제국의 선포

전문가팀 2025. 1. 12. 01:44
반응형

고종(재위 1863~1907)은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첫 번째 황제로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군주입니다. 고종의 재위 기간은 조선 왕조가 전환기를 맞이한 시기로,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격변과 국제적 압박 속에서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였습니다. 고종의 즉위부터 대한제국 선포, 흥선대원군과 민씨 세력의 갈등, 아관파천, 을미사변 등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형성과 몰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들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종의 즉위와 주요 사건들을 중심으로 그의 정치적 행보와 당시 시대적 배경을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고종 즉위의 배경과 조선의 변화

어린 나이에 즉위한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섭정

고종은 1863년, 조선 제26대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당시 고작 12세였던 고종은 정치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하응)이 섭정을 맡으며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 흥선대원군의 통치: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다양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경복궁 중건, 서원 철폐, 척화비 건립, 대전회통 편찬 등은 모두 그의 강력한 왕권 강화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 삼정의 문란 해결: 조선 후기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은 국가 재정 악화와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개혁하고 민생 안정을 도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점차 양반 사대부와 지방 사족의 반발을 초래했고, 그의 독단적인 정치 운영 방식은 내부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흥선대원군과 민씨 세력의 갈등

민씨 세력의 부상

고종이 성년이 된 이후, 왕비인 명성황후(민비)의 친정 세력인 민씨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민씨 세력을 경계하며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분투했지만, 결국 민씨 세력의 영향력 앞에 밀려 1873년 섭정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갈등의 심화

  • 민씨 세력의 친외교 정책: 민씨 세력은 외세와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친청파와 친러파로 나뉘어 조선의 외교 정책을 주도했습니다.
  • 흥선대원군의 저항: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민씨 세력의 외교적 노선을 비판하며 쇄국 정책을 주장했습니다. 특히, 일본과의 조약 체결 및 개항 이후 민씨 세력이 주도한 근대화 정책을 두고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 1874년 축출 이후의 영향: 흥선대원군은 섭정에서 물러난 후에도 민씨 세력과 끊임없는 대립 관계를 이어갔고, 이는 조선의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습니다.

 

을미사변과 민씨 세력의 몰락

을미사변의 배경

을미사변(1895년)은 조선 말기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로, 일본의 개입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 청일전쟁과 일본의 영향력 강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주도권을 확립하려 했습니다.
  • 일본의 친일 내각 구성: 일본은 조선 내에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민씨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압박을 가했습니다.
  • 명성황후(민비)의 제거: 일본은 민씨 세력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의 침략적 성격과 조선 왕실의 무력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을미사변의 결과

  • 고종의 정치적 고립: 명성황후를 잃은 고종은 일본의 압박 속에서 점점 더 고립되었습니다.
  • 반일 감정 고조: 을미사변 이후 조선 내에서 반일 감정이 크게 고조되었으며, 이는 항일 의병 운동의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아관파천과 조선의 외교적 전환

아관파천의 배경

1896년 2월, 고종은 일본의 압박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습니다.

  • 러시아의 보호 요청: 고종은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하며, 약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물렀습니다.
  • 국내외적 충격: 아관파천은 조선 내부와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조선의 외교 노선이 친러 중심으로 급격히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관파천의 결과

  • 일본의 영향력 약화: 아관파천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으나, 이는 조선이 또 다른 외세인 러시아에 의존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 내정의 혼란: 고종의 부재로 인해 조선 내부의 정치적 혼란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 즉위

대한제국 선포의 배경

1897년, 고종은 조선의 전통적인 체제와 외세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주독립 국가임을 선언하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 경운궁 환궁: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운궁(현재 덕수궁)으로 환궁했습니다.
  • 자주독립 의지: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자주독립 국가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선언이었습니다.

대한제국 선포의 결과

  • 국가 체제 전환: 조선은 대한제국이라는 이름 아래 황제 중심의 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 외교적 독립의 상징: 대한제국 선포는 외교적 독립을 상징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일본과 러시아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 근대화 노력: 고종은 황제 즉위 후 군사 및 행정 체제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려 했으나, 외세의 간섭으로 인해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고종 즉위와 조선 후기 정치의 의의

조선 후기 정치의 변곡점

고종의 즉위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전환기를 상징합니다. 흥선대원군의 섭정부터 대한제국 선포에 이르기까지, 고종의 재위 기간은 전통적인 조선 체제가 무너지고 근대적 국가로 변화하려는 과정 속에서 겪은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대한제국의 한계

고종과 대한제국은 자주독립을 선언했으나, 외세의 간섭 속에서 주권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대한제국은 1910년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결론

고종의 즉위와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 왕조가 근대화와 전통의 기로에서 선택을 강요받은 시기를 대표합니다. 흥선대원군과 민씨 세력의 갈등,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의 사건들은 조선이 국내외적 도전에 직면했던 과정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와 같은 자주독립 노력을 기울였지만, 외세의 압박 속에서 국가의 주권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은 조선과 대한제국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한 시기로 평가되며, 근대 조선의 비극적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고종은 몇 살에 즉위했나요?
A1: 고종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며, 초기에는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맡아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Q2: 흥선대원군과 민씨 세력의 갈등은 왜 발생했나요?
A2: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와 쇄국 정책을 추진했으나, 민씨 세력은 외세와의 관계를 활용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며 서로 갈등을 빚었습니다.

 

Q3: 을미사변은 무엇인가요?
A3: 을미사변은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민비)를 시해한 사건으로, 조선 왕실과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안긴 비극적 사건입니다.

 

Q4: 아관파천이란 무엇인가요?
A4: 아관파천은 1896년 고종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으로, 조선의 외교 노선이 친러 중심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Q5: 대한제국은 언제 선포되었나요?
A5: 대한제국은 1897년에 선포되었으며,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며 자주독립 국가임을 선언했습니다.

 

Q6: 대한제국의 선포는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A6: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자주독립을 선언한 사건으로, 황제 중심의 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Q7: 고종 재위 시기의 조선은 어떤 국제적 상황에 처해 있었나요?
A7: 고종 재위 시기 조선은 서양 열강과 일본, 러시아 등 외세의 압박과 침탈 속에서 국제적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Q8: 고종의 정치적 행보는 성공적이었나요?
A8: 고종은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시도했으나, 외세의 압박과 내부 정치적 갈등 속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대한제국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https://ekqwlckdrh.tistory.com/256

 

흥선대원군(이하응, 1820~1898)의 정책과 그 역사적 의의

흥선대원군(이하응, 1820~1898)은 조선 후기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인물 중 한 사람으로, 1863년 어린 고종이 즉위하면서 실질적으로 조선의 국정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경복궁 중건, 서원 철폐 정책,

ekqwlckdrh.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