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는 660년에 공식적으로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멸망은 단순히 한 왕국의 패망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벌어진 치밀한 외교와 군사 전략, 그리고 민족의 운명이 걸린 총력전의 결과였습니다. 신라와 당나라가 맺은 나·당 동맹은 고립되어 있던 신라에게는 절호의 기회였고, 백제에게는 거대한 외세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였습니다. 결국 사비성의 함락, 황산벌 전투에서의 패배, 왕족의 해외 망명이라는 일련의 사건은 백제 왕국의 마지막 순간을 상징하는 역사적 장면이 되었으며, 삼국의 판도를 송두리째 뒤바꿔놓는 계기가 됩니다. 당시 백제는 의자왕의 통치 아래 문화적으로는 찬란한 황금기를 구가했지만, 정치적 내부는 불안정했고 귀족 세력 간의 분열이 심화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무리한 영..

삼국 시대 말기,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각 구도는 오랜 대립과 전쟁을 반복하며 한반도 전체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이들 세 나라는 모두 통일의 대업을 꿈꾸었지만, 각자의 세력과 외교 관계는 상이했고, 내부 상황도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이 가운데 신라는 외교적 승부수를 던지게 됩니다. 바로 당나라와의 동맹, 이른바 나·당 동맹(羅唐同盟)입니다. 신라의 김춘추는 이 동맹을 통해 고립된 외교적 위치를 벗어나고, 더 나아가 삼국 통일의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나·당 동맹의 결성은 단순한 군사 동맹 이상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이는 신라가 자력으로는 어려운 통일 대업을 이루기 위해 당나라라는 세계 초강대국의 힘을 끌어들인 전략적 선택이었고, 동시에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에도 큰 영향..

신라 천 년 역사는 찬란한 문화와 강력한 왕권의 시기를 거쳐, 결국 내부 분열과 외부의 압박 속에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멸망의 서곡을 알리는 결정적 사건이 바로 경애왕(景哀王)의 죽음과 함께한 왕궁의 함락, 그리고 이어진 경순왕의 즉위입니다. 이 일련의 사건은 단순한 왕의 교체를 넘어, 신라의 국가 체제가 근본적으로 무너지는 역사적 분기점으로 평가됩니다. 경애왕은 신라 제53대 국왕으로, 효공왕의 아들로 즉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집권하던 시기는 이미 신라의 중앙권력이 거의 와해된 상태였고,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며 사실상 자치 통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후백제의 견훤, 후고구려의 궁예(나중에는 왕건) 등의 신흥 세력은 신라의 지리적 기반을 침식하며, 점점 수도 금성(경주)으..

신라 중후기, 동북아시아의 해상 교역로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특히 당나라, 일본, 발해, 신라 등 여러 국가 사이의 외교와 무역이 번성하던 시기, 그 중심에서 해상 실크로드를 지배하고, 국제 무역의 실질적인 패권을 장악한 인물이 바로 장보고(張保皐)입니다. 장보고는 단순한 무장이 아닌, 군사력과 경제력을 겸비한 해양 제후로서 신라 해상 무역의 중흥기를 이끌었습니다. 그가 설치한 청해진(淸海鎭)은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군사적·상업적 거점이자, 신라 바깥의 또 다른 신라라 불릴 정도로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장보고는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 군대에서 무장으로 활약한 뒤, 귀국하여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면서 해상 질서를 바로잡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는 단지 군사..

신라 중후기는 표면적으로는 통일 국가의 안정기였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갈등과 긴장, 모순이 누적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 진골 귀족의 권력 경쟁, 지역 세력의 성장, 중앙 권력의 분산 등 다양한 문제가 얽히면서 신라 사회는 점차 균열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 바로 김헌창의 난(김헌창 반란, 822년)입니다. 이 사건은 신라 정치사에서 중앙집권 체제에 도전한 대표적인 지방 반란이며, 신라의 통일 질서가 내부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김헌창은 경덕왕의 아들 김주원이 아버지로, 정통 왕위 계승 계열에 있었지만 실권을 잡지 못한 왕족 출신이었습니다. 김주원은 헌덕왕과의 왕위 계승 경쟁에서 밀려났으며, 이후 아들인 김헌창은 ..

통일신라가 본격적인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건 중 하나가 바로 김흠돌의 반란(681년)입니다. 이 반란은 단순한 개인의 정치적 야망이 아니라, 신라 귀족 사회 내부의 긴장과 왕권 중심 체제 확립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벌어진 정치적 충돌이었습니다. 김흠돌은 신라 제30대 왕인 문무왕의 사위이자, 고위 진골 귀족 출신으로 막강한 권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야망과 신문왕의 중앙집권 정책은 정면으로 충돌했고, 결국 그는 신문왕을 제거하려는 반란을 시도하게 됩니다. 당시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로, 통일신라의 안정과 제도 정비에 전념하던 개혁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신문왕이 추진한 일련의 귀족 견제 정책과 왕권 강화 기조는 보수적인 진골 귀족 세..

신라의 삼국 통일은 단순한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외교, 전략, 정보전, 정치적 안배, 그리고 무엇보다도 뛰어난 지휘관의 존재로 이루어진 복합적 성과였습니다. 그 중심 인물이 바로 김유신(金庾信)입니다. 김유신은 신라를 대표하는 무장이자, 삼국 통일의 실질적인 전략가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군사적인 역량뿐 아니라, 정치적 수완과 외교 능력까지 겸비하여 신라의 삼국 통일을 이끈 핵심 인물로 역사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특히 김유신은 황산벌 전투의 승리를 통해 백제의 최정예 부대를 꺾고, 백제 정벌의 결정적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 전투는 단순한 전투의 승패를 넘어서, 백제의 멸망을 가속화시키고, 신라-당 동맹의 실질적 성과를 나타낸 군사적 쾌거였습니다. 황산벌 전투는 신라의 명운을 건 일..

통일신라 말기는 혼란과 분열의 시기였습니다. 특히 제51대 국왕이자 신라의 마지막 여왕이었던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의 통치기는 왕권의 극심한 약화, 지방 호족의 급격한 성장, 그리고 후삼국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시대였습니다. 진성여왕은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시기에 왕위에 올라, 정치·사회적 위기를 수습하려 노력했지만, 그녀의 개혁과 통치력은 시대의 거센 흐름을 막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진성여왕의 즉위는 형식적으로는 정통성을 갖췄지만, 실제로는 왕실 권위가 땅에 떨어진 상태였고, 중앙 조정은 귀족 간의 분열과 권력 투쟁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특히 진성여왕은 여왕이라는 점에서 보수적인 귀족과 백성의 저항을 더 강하게 받았고, 이는 그녀의 통치 기반을 더욱 불안..

통일신라의 문화적 황금기는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대에 이르러 불교를 중심으로 한 예술과 사상, 신앙이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경문왕은 신라 제48대 왕으로, 진골 귀족 출신이자 유학적 소양을 갖춘 군주였지만 동시에 불교를 정치 이념과 신앙의 중심으로 삼아 왕권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 활용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재위 시기는 외적으로는 비교적 평온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왕권의 균열과 지방 호족 세력의 성장이라는 조짐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과도기였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경문왕은 불교를 왕실의 공식 신앙으로 재정립하고, 이를 통해 문화·예술의 황금기를 열며 신라의 위엄을 다시 한 번 세우고자 했습니다. 경문왕 시대의 불교는 단순한 종교적 기능을 넘어, 정치, 사회, 예술, 건축, 과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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