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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발해+후삼국 스토리

발해와 고려의 관계, 고려가 발해를 계승한 이유

전문가팀 2025. 2. 26.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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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渤海)는 698년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한 국가로, 한때 동아시아에서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926년 거란(요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였고, 이후 발해 유민들은 고려로 대거 유입되었다. 고려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국가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활용했고, 발해 문화를 고려 문화에 융합하여 새로운 국가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 글에서는 발해 멸망과 고려의 대응, 발해 유민의 고려 귀속, 발해와 고려의 교류, 발해 문화의 고려 전파 등 발해와 고려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고려가 발해를 계승했다는 의미가 단순한 역사적 연결성을 넘어, 고려 왕조의 국가 정체성 형성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살펴본다.

 

 

발해 멸망과 고려

1. 발해의 멸망 (926년)

발해는 926년 거란(요나라)의 침공을 받아 수도 상경(上京)이 함락되면서 멸망했다.

이후 일부 발해 왕족과 귀족들은 거란의 지배를 받아들였지만, 많은 유민들은 고려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발해 멸망 이후에도 거란은 발해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발해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2. 고려 태조 왕건의 대응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를 "형제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발해 멸망 이후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왕건은 발해 유민을 포용하면서 고려가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라는 점을 강조했다.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유입됨으로써, 고려의 인구가 증가하고 국가 기반이 더욱 강해졌다.

 

 

발해 유민의 고려 귀속

발해 멸망 이후 많은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했으며, 고려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정치·군사·경제적으로 활용하였다.

1. 발해 왕족의 고려 귀순

발해 왕족이었던 대광현(大光顯)이 고려로 망명하였고, 왕건은 그를 환대하며 왕씨 성을 하사하였다.

대광현과 그의 세력은 고려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발해 유민들의 고려 정착을 주도했다.

2. 발해 귀족과 장수들의 고려 합류

발해의 관리들과 장수들은 고려의 관료 체제와 군사 조직에 편입되었다.

이들은 고려 초기 국정 운영과 군사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 발해 유민의 고려 정착

고려는 발해 유민들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농업과 상업 활동을 지원하였다.

발해 유민들은 주로 북방 지역에 정착하였으며, 고려의 북방 개척과 방어에 기여했다.

 

이처럼 발해 유민의 고려 귀속은 고려의 국가 정체성 형성과 영토 확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발해-고려 교류

발해와 고려는 발해 멸망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으며, 고려는 발해를 계승한 국가로서 발해 유민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다.

1. 외교적 관계

고려와 발해는 후삼국 시대 동안 후백제와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교류를 이어갔다.

발해 멸망 이후에도 고려는 발해 부흥 운동을 지원하는 태도를 보였다.

2. 무역과 경제적 교류

발해는 고려와 무역을 통해 모피, 약재, 인삼 등을 교환하였고, 고려는 곡물과 직물을 제공하였다.

발해 멸망 후에도 고려로 유입된 발해 상인들이 고려의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다.

3. 군사적 협력

발해 멸망 전까지 고려와 발해는 공동으로 거란과 여진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발해 출신 장수들이 고려의 북방 방어선 구축에 기여하였다.

 

이처럼 발해와 고려는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발해 멸망 이후에도 고려는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발해 문화의 고려로 전파

발해는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면서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으며, 이러한 문화 요소들은 고려로 전파되어 고려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 행정 체제와 관료 조직

발해의 3성 6부제(당나라 영향을 받은 관료제)는 고려의 중앙 행정 조직에 영향을 미쳤다.

발해 출신 관료들이 고려의 관료 체제에 편입되면서 고려의 행정 운영에 기여했다.

2. 불교와 사찰 건축

발해는 불교가 발달한 국가였으며, 불교 사찰 건축 양식이 고려로 전파되었다.

고려의 불교 미술과 건축 양식에서 발해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3. 문자와 학문

발해에서는 한문(漢文)이 공식 문서와 학문에서 사용되었으며, 이러한 학문적 전통이 고려에서도 이어졌다.

발해 유민 출신 학자들이 고려에서 활약하며 유교 경전과 불교 경전을 번역·해석하는 데 기여하였다.

4. 생활 문화와 풍습

발해 유민들은 고려의 의복, 음식, 생활 습관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고려의 귀족 문화 속에서 발해풍의 요소가 남아 있었다.

이처럼 발해 문화는 고려 사회에 깊숙이 스며들었으며, 고려는 발해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시켰다.

 

 

결론

고려는 발해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으며, 발해 멸망 이후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가 정체성을 강화하였다. 발해 유민들은 고려의 정치·군사·경제·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고려는 이를 바탕으로 북방 개척과 국가 체제 정비를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고려가 발해를 계승했다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연결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가 고구려와 발해의 정신을 이어받아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덕분에 고려는 한반도와 북방 지역에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며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국가 운영을 이어갈 수 있었다.

 

 

https://ekqwlckdrh.tistory.com/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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