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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 항쟁(12311273)은 고려가 강력한 몽골 제국(훗날 원나라)의 침략에 맞서 42년 동안 이어온 장기 항전의 역사입니다. 고려는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도 강화도 천도와 삼별초의 항전을 통해 끈질긴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군민이 합심하여 싸우며 자주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노력은 오늘날까지도 민족의 자부심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장기적인 전쟁으로 국가 경제는 피폐해졌고, 결국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기(1270-1356)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글에서는 몽골의 침략 배경, 고려의 강화도 천도와 장기 항전 전략, 삼별초의 항전, 그리고 대몽 항쟁 이후 원 간섭기로의 전환 과정을 살펴보며, 고려의 저항 정신과 역사적 교훈을 되짚어보겠습니다.

몽골(원나라)의 고려 침략 배경
몽골의 고려 침략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닌,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13세기 초 몽골은 칭기즈 칸을 중심으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며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1. 몽골 제국의 확장 정책
- 1206년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한 후, 세계 제패를 목표로 동서로 확장 정책을 펼쳤습니다.
- 금나라를 공격하며 동아시아 질서 재편에 나섰고, 이후 고려를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 동북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려 하였습니다.
2. 고려와 몽골의 첫 마찰 – 거란(요나라) 잔당 소탕전
- 1219년, 고려와 몽골은 **거란 잔당(대요수국)**을 공동으로 격퇴하며 우호적 관계를 맺었습니다.
- 그러나 몽골은 이 전쟁을 계기로 고려를 속국화할 야심을 드러내며 공물 요구를 강화하였습니다.
3. 몽골의 공물 요구와 고려의 거부
- 1225년, 몽골은 고려에 대해 막대한 공물(인력·물자)을 요구했으나, 고려는 이를 자주국으로서의 체면 때문에 거부했습니다.
- 같은 해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사건이 발생하며, 이를 빌미로 몽골의 침략 명분이 형성되었습니다.
📌 첫 침략: 1231년, 살리타이(撒里台) 장군이 이끄는 몽골군이 1차 침입을 감행하며 대몽 항쟁의 서막이 열립니다.
강화도 천도와 장기 항전 전략
고려는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개경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고종(高宗)의 결단으로 강화도로 천도(1232년)를 단행했습니다. 이는 섬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장기 항전을 펼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1. 강화도 천도의 전략적 이유
- 해상 방어에 유리: 강화도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해안 방어시설 구축이 용이하여 몽골 기병이 접근하기 어려웠습니다.
- 전쟁 장기화 유도: 몽골군은 기동전과 단기전에 강했지만, 장기전에 취약하다는 점을 노렸습니다.
- 왕실과 중앙 관료 보호: 국왕과 중앙정부를 보호하여 국가 체제 유지를 꾀했습니다.
- 민심 결집: 강화도 천도를 통해 국왕이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알리고 민심을 결집했습니다.
2. 고려의 장기 항전 전략
- 성곽 중심 방어 체제 구축
- 개경 함락 이후, 고려는 산성(山城)과 해안 요새를 중심으로 저항하였습니다.
- 특히 처인성(處仁城) 전투에서 김윤후가 몽골의 장수 살리타이를 사살하며 대승을 거두었습니다(1232년).
- 해상 전력 강화
- 고려는 해군력을 강화하여 몽골군의 해상 침공 시도를 차단하였습니다.
- 강화도 해안에 방어 기지를 설치하고, 화포를 개발하여 해상 방어 능력을 끌어올렸습니다.
- 민중의 적극적 참여
- 민중들은 몽골군에 맞서 의병을 조직하고 유격전술로 저항하였습니다.
- 특히 처인성 전투와 충주성 전투는 군민 협력의 대표적 사례로 꼽힙니다.
- 문화·종교적 결속 강화
-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강화도에서 새로 조판하여 불교적 가호와 민족적 결속을 도모했습니다.
📌 주요 전투: 처인성 전투(1232년), 충주성 전투(1253년), 초주전투(1256년)
삼별초의 항전과 고려의 저항
고려는 1259년 몽골과 강화 협상을 통해 일시적으로 전쟁을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개경 환도(1270년) 이후, 삼별초(三別抄)가 몽골에 굴복한 고려 조정을 배신자로 규정하며 항전을 이어갑니다.
1. 삼별초란?
- 삼별초는 고려의 특수군대로, 좌별초·우별초·신의군으로 구성되었습니다.
- 원래는 강화도 방어군이었으나, 몽골과의 강화를 반대하며 자주 독립을 위해 최후의 항전을 벌인 군대로 기억됩니다.
2. 삼별초의 항전 과정
- 강화도에서의 봉기(1270)
- 배중손(裵仲孫)의 지도 아래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항전을 시작하였습니다.
- 진도(珍島)로의 이동
- 삼별초는 강화도가 몽골군에 장악당하자, 진도(전남)로 이동하여 항몽(抗蒙)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 진도에서의 항전은 3년 동안 지속되며 몽골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했습니다.
- 제주도로 최후의 저항(1273)
- 진도가 함락된 후,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를 이끌고 제주도로 이동하여 최후의 항전을 이어갔습니다.
- 1273년 제주도 함락으로 삼별초의 저항은 막을 내리지만, 그들의 자주국 정신은 후대에 애국의 상징으로 기억됩니다.
📌 삼별초 항전의 의의
- 자주 독립의 정신을 끝까지 지켰으며, 민중이 주도한 저항 운동으로서의 가치를 가집니다.
- 고려의 주권 수호 의지를 세계에 보여주었으며, 대몽 항쟁의 마지막 불꽃을 피웠습니다.
대몽 항쟁 이후 고려의 원 간섭기 전환
42년에 걸친 대몽 항쟁은 고려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고려는 1270년 몽골과의 강화를 통해 전쟁을 마무리하였으나,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는 원 간섭기(1270~1356)를 맞이하게 됩니다.
1. 고려의 내부 변화
- 친원 세력 득세
- 원나라의 지원을 받은 기철(奇轍) 등 친원파(親元派)가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 고려 국왕은 원나라의 승인 없이 즉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부마국(駙馬國)화
-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황제 사위의 나라)로 전락하여 국제적 위상이 약화되었습니다.
- 고려 국왕은 원나라 공주(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여 왕실이 원나라와 혈연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 내정 간섭 강화
- 다루가치(達魯花赤)라는 원나라 감찰관이 고려에 파견되어 국정 전반을 감독하였습니다.
- 영토 변화
- 쌍성총관부(함경도 지역), 동녕부(서경, 평양 지역), 탐라총관부(제주도)가 설치되어 직접적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2. 사회·경제적 변화
- 전쟁의 후유증
- 42년의 전쟁으로 농토가 황폐화되고,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졌습니다.
- 몽골군의 약탈과 전쟁 비용 부담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었습니다.
- 문화적 교류 증가
- 몽골의 풍습이 고려에 유입되며, 고려 양식에 몽골 문화가 혼합되었습니다.
- 몽골식 복장(오라비), 음식(우유차, 호떡) 등이 도입되었으며, 원나라의 과학·기술이 전해졌습니다.
3. 대몽 항쟁의 역사적 의의
- 장기 항전의 의지: 42년 동안 강대국 몽골에 맞서 싸우며 국가와 민족의 자주성을 지킨 투쟁이었습니다.
- 삼별초의 저항 정신: 끝까지 항전을 이어간 삼별초는 독립 의지와 희생 정신을 상징합니다.
- 고려 불교 문화의 발전: 전쟁 중에도 팔만대장경을 조판하며 불교적 결속력과 민족적 정체성을 강화했습니다.
FAQ (자주 묻는 질문)
1. 몽골은 왜 고려를 침략했나요?
→ 금나라와 일본을 정복하려는 동아시아 지배 전략 속에서 고려를 군사적 거점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2. 강화도 천도의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 해상 방어와 장기 항전을 통해 몽골군을 지치게 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3. 삼별초는 왜 끝까지 저항했나요?
→ 고려 정부의 몽골 항복을 자주적 국가의 포기로 여기고, 독립 정신을 지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4. 처인성 전투는 왜 유명한가요?
→ 김윤후가 승병(僧兵)을 이끌고 살리타이 장군을 사살하며 몽골군의 사기를 꺾은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5. 팔만대장경은 왜 제작되었나요?
→ 국난 극복과 몽골군 격퇴를 기원하며 불교적 가호를 얻기 위해 강화도에서 제작되었습니다.
6. 원 간섭기 때 고려 왕실의 변화는?
→ 고려 왕이 원나라 황실과 혼인하며 부마국으로 전락하였고, 원나라 간섭이 강화되었습니다.
7. 원나라와의 관계는 언제 끝났나요?
→ 공민왕(1356년)이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수복하며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났습니다.
8. 대몽 항쟁이 남긴 교훈은?
→ 강대국의 압박에도 민족적 단합과 독립 의지를 잃지 않은 자주국 정신의 중요성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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