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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상업 발전 – 개경과 서경의 번성, 경제 활력의 중심지

전문가팀 2025. 2. 1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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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는 농업 발전과 더불어 상업 활동이 점차 활성화된 시기였다. 개경(개성)과 서경(평양)은 국내외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하며, 시전(市廛)을 중심으로 한 시장 경제와 화폐 유통이 발전했다. 해동통보, 은병(銀甁)과 같은 화폐가 발행되었고, 국제 교역을 통해 송(宋)나라, 거란, 일본, 아랍 상인들과의 무역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는 평민들이 상업을 통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국가 주도의 상업 정책과 신분제 사회의 한계로 인해 상업이 자율적으로 발전하는 데는 어려움이 존재했다.

 

이번 글에서는 개경과 서경의 시장과 경제 활동, 고려 화폐의 유통, 상업 활동을 통한 신분 상승, 그리고 고려 상업 발전의 한계를 시대적 흐름에 따라 자세히 살펴보겠다.

 


개경과 서경의 시장과 경제 활동 – 고려 경제의 중심지

고려는 통일 이후 정치적 안정과 농업 생산력 증가를 바탕으로 상업 발전을 도모했다. 개경과 서경은 고려의 주요 도시로서 상업과 유통의 중심지로 기능하며, 전국의 물자와 국제 무역품이 모이는 경제적 허브로 성장했다.

1. 개경(개성) – 고려의 경제 수도

개경은 고려의 수도로, 국내외 교역과 상업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도시였다.

  • 개경의 시전(市廛): 관청에서 직접 관리하는 공식 시장으로, 상인들이 다양한 물품을 거래했다.
  • 국제 교역의 중심지: 송나라 상인들과 거란, 여진, 일본, 아랍 상인들이 개경에서 활발히 교역했다.
  • 벽란도(碧瀾渡)의 번성: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고려의 대표적 항구로, 국제 상인들이 모이는 거점이었다.

개경의 주요 상업 활동

  • 농산물 거래: 쌀, 콩, 보리와 같은 농산물이 대규모로 유통되었다.
  • 공예품 판매: 고려청자, 나전칠기, 금속 공예품이 시장에 나오고, 일부는 해외로 수출되었다.
  • 무역 상품 교환: 송나라 비단, 약재, 서적과 아랍의 향료, 금속 제품이 고려로 유입되었다.

2. 서경(평양) – 북방 교역의 요충지

서경은 북방 지역과의 교류 중심지로, 거란, 여진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 활력을 얻었다.

  • 서경 시전의 운영: 개경보다 규모는 작지만, 농산물과 모피, 특산물 거래가 활발했다.
  • 군사적 요충지: 북방 방어의 전략적 위치로, 군수품 유통이 중요했다.
  • 유통망 확장: 평양을 통해 거란, 여진과 교역하며 모피, 약재, 철기 제품을 주로 거래했다.

서경은 북방 교역을 통해 고려 경제의 다변화를 도모하며, 개경과 함께 상업 발전을 견인했다.


고려 화폐(해동통보, 은병)의 유통 – 상업 발전의 촉매제

고려는 상업 활성화를 위해 화폐를 발행하고 유통시켰다. 농업 경제가 중심이던 사회에서 화폐의 도입은 상업 발전을 위한 중요한 시도였지만, 사회적 인식 부족과 경제 구조적 한계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 해동통보(海東通寶) – 고려 최초의 금속 화폐

  • 995년(성종 14년)에 처음 주조된 동전 형태의 화폐로, 송나라의 '송원통보'를 참고하여 제작했다.
  • '海東通寶'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개경과 서경의 시장에서 사용되었다.
  • 국내 유통뿐만 아니라 송나라와의 무역에서도 활용되며, 국제 무역 확대에 기여했다.

2. 은병(銀甁, 활구) – 항아리 모양의 은화

  • 고려 숙종(1097~1105) 시기에 주조된 은화로, 항아리 모양을 하고 있어 '활구'라고 불림.
  • 주로 대규모 거래와 국가 재정 운용에 사용되었으며, 귀족 사회에서 사치품 거래에도 활용되었다.
  • 농민과 일반 상인에게는 낯선 형태였기 때문에, 일상적인 거래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3. 화폐 유통의 어려움과 한계

  • 농업 중심의 사회 구조: 물물교환에 익숙한 사회에서 화폐 사용이 쉽지 않았다.
  • 귀족들의 화폐 사용 기피: 대부분의 귀족들은 토지와 생산물을 재산의 척도로 인식하며, 화폐 사용을 꺼렸다.
  • 일상 거래에서의 정착 실패: 관청의 강력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는 여전히 곡물과 면포(무명천)가 화폐로 사용되었다.

고려의 화폐 발행은 상업 발전의 초석을 마련했지만, 사회적 수용 부족으로 화폐 경제가 완전히 정착되지는 못했다.


상업 활동과 신분 상승 기회 – 경제적 활력 속의 사회 변화

고려 사회는 전통적으로 신분제 사회였지만, 상업의 발전으로 일부 계층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특히 개경과 서경의 상업 활동은 계층 이동의 통로가 되었다.

1. 상업 활동을 통한 경제력 축적

  • 상인 계층(市井層): 개경과 서경의 시장에서 활동하던 상인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회적 지위를 향상했다.
  • 벽란도의 해상 무역 상인: 국제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며, 일부는 국가에 기여하여 관직을 얻는 사례도 발생했다.
  • 관청 소속 시전 상인(시전상인):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시전을 운영하고, 상업 독점권(금난전권)을 부여받아 경제적 우위를 확보했다.

2. 신분 상승의 실제 사례

  • 공로를 세운 상인 가문: 국가에 물자를 조달하거나 세금 납부를 통해 공헌한 상인이 서리(胥吏) 계층으로 진입했다.
  •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 아랍·송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재력을 얻은 상인들이 지방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3. 상업을 통한 사회 변화

  • 농업 중심 사회에서 상업의 비중 증가: 상업 종사자 수가 증가하며 개경과 서경의 경제적 중요성 증가.
  • 전통적 신분제에 균열 발생: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일부 계층이 신분 상승을 시도하며, 양반 중심의 사회 구조에 변화를 가져옴.

상업 활동을 통해 신분 상승이 가능해졌지만, 신분제 사회의 강력한 구조적 한계는 여전히 존재했다.


고려 상업 발전의 한계 – 성장의 벽에 부딪힌 이유

고려의 상업은 개경과 서경을 중심으로 발전했지만, 사회 구조적·정책적 문제로 인해 한계를 드러냈다.

1.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

  • 고려 사회는 농업이 국가 경제의 근간이었으며, 상업은 부차적인 경제 활동으로 인식되었다.
  • 농민들은 상업보다는 농사에 집중해야 했고, 국가도 농업 생산력 유지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2. 국가의 지나친 통제

  • 관영 시전을 통해 국가가 상업을 강하게 통제하면서, 자유로운 시장 활동이 제한되었다.
  •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통해 국가 지정 상인들에게 독점권을 부여하며, 민간 상업 활동이 위축되었다.

3. 화폐 경제의 정착 실패

  • 해동통보, 은병의 발행에도 불구하고, 현물 교환이 여전히 주를 이루었다.
  • 농민과 지방 상인들은 익숙하지 않은 화폐보다는 곡물, 포(布), 특산물을 선호했다.

4. 국제 교역의 외부 요인

  • 몽골의 침입(1231~1259)으로 국제 교역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며, 상업 발전이 큰 타격을 받았다.
  • 무신정권 시기의 정치적 혼란은 경제적 불안정으로 이어져, 상업 활성화에 제동을 걸었다.

결론: 고려 상업 발전의 의의와 한계

고려의 상업 발전은 개경과 서경을 중심으로 국가 경제의 다변화를 추구하며, 국제 교역을 통해 동아시아 경제권의 일원으로 자리 잡은 시기였다. 해동통보와 은병을 발행하며 화폐 경제를 도입하고, 국내외 상인들과 교류하며 고려 상업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와 국가의 강력한 상업 통제, 사회적 인식의 부족으로 인해 화폐 경제의 정착과 민간 상업의 자율적 성장에는 한계를 보였다.

이러한 고려의 상업 경험은 이후 조선 시대의 상업 정책 발전에 중요한 교훈이 되었으며, 개경과 서경의 경제적 성장은 한국 경제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FAQ – 고려 상업 발전에 대한 궁금증 7가지

  1. 고려 시대에 상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농업 생산력 증가와 국제 교역의 활성화로 개경과 서경의 시장이 성장했고, 벽란도를 중심으로 한 국제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2. 해동통보는 어떤 화폐였나요?
    995년 성종 시기에 발행된 고려 최초의 금속 화폐로, 동전 형태를 띠었으며 주로 개경과 서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3. 은병(銀甁)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나요?
    항아리 모양의 은화로, 대규모 거래와 국가 재정 운영에 사용되었으며, '활구'라고도 불렸습니다.
  4. 벽란도는 어떤 역할을 한 항구였나요?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벽란도는 고려의 국제 교역 중심지로, 송나라·아랍·일본 상인들이 모여 교역하던 항구였습니다.
  5. 고려 시대 상인들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나요?
    일부 상인은 부를 축적하고 국가에 기여하여 하급 관직에 진출하며,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기도 했습니다.
  6. 고려 상업이 발전했음에도 화폐 경제가 정착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 귀족층의 화폐 기피, 현물 교환에 익숙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화폐 사용이 일상에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7. 고려 상업 발전이 조선 시대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고려의 상업 경험은 조선 초기 화폐 정책과 시전 운영 방식에 영향을 주었으며, 국제 교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고려의 상업 발전은 경제 구조의 변화를 모색하며 화폐 경제와 국제 교역의 가능성을 보여준 시기였다. 비록 완전한 자율 상업 체제로 나아가지 못했지만, 상업 발전을 향한 고려의 도전은 한국 경제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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