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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유민 포용 정책 – 고려,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다

전문가팀 2025. 2. 9.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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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698년 대조영이 건국한 이후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지만, 926년 거란(요나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게 되었다. 발해가 망하면서 많은 발해 유민들은 각지로 흩어졌으며, 그중 상당수가 고려로 유입되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포용하며 새로운 국가의 통합을 도모했다.

 

발해 유민의 유입은 단순한 난민 문제가 아니라, 고려의 국가 운영과 문화적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왕건은 발해 유민들에게 고려 내 정착 기회를 제공하고, 정치·경제·문화적으로 통합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포용 정책 덕분에 고려는 민족적 통합을 이루며 강력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발해 멸망과 고려로의 유입 과정, 발해 유민 정착 정책, 발해 출신 관료와 문화, 발해 유민과 고려의 관계 변화 등을 시대적 흐름에 맞춰 상세히 살펴보겠다.

 


발해 멸망과 고려 유입

발해의 성장과 멸망

발해는 698년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세운 국가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해동성국'이라 불릴 정도로 국력이 강성했으며, 당나라와 대등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0세기 초, 북방에서 강성해진 거란족이 발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 924년 – 거란이 발해 서북부를 공격하며 국경 충돌 발생.
  2. 925년 – 거란군이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여 발해 수도 상경성이 포위됨.
  3. 926년 –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하고, 왕족과 귀족들은 포로로 끌려가거나 도망침.

 

발해 유민의 이동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인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어 이동했다.

  1. 거란에 동화된 집단 – 일부 귀족과 백성들은 거란에 의해 강제 이주되어 요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2. 일본과 송나라로 망명한 집단 – 발해 상류층 일부는 바다를 통해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3. 고려로 유입된 집단 – 가장 많은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이동하여 새로운 정착지를 찾았다.

왕건은 발해 유민들을 단순한 난민으로 보지 않고, 동족으로 여기며 적극적으로 포용했다. 이는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 국가로 인식하고 있던 고려의 정체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발해 유민 정착 정책

고려의 태조 왕건은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정착을 지원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왕건의 포용 정책

  1. 고려 국경 내 정착 허용 – 발해 유민들에게 고려의 주요 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토지를 제공하였다.
  2. 발해 출신 인재 등용 – 발해 출신 귀족과 관료들을 적극적으로 고려의 정치 체제에 편입시켰다.
  3. 문화적 통합 노력 – 발해의 문화를 존중하며 고려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유도했다.
  4. 발해 부흥 운동 지원 – 일부 발해 유민들은 발해 부흥을 꿈꾸며 후발해 등의 세력을 형성했으며, 고려는 이들을 일정 부분 지원했다.

발해 유민들은 주로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지역에 정착하였으며, 일부는 고려의 행정과 군사 조직에 편입되어 국가 운영에 기여했다.


발해 출신 관료와 문화

발해 출신 관료들의 활약

고려는 발해 멸망 이후 많은 발해 출신 인재들을 등용하며 국가의 행정력을 강화했다.

  1. 대광현 – 발해 왕족 출신으로 고려로 망명한 후 왕건에게 환대받았으며, 고려에서 높은 관직을 맡았다.
  2. 유인궤 – 발해 유민 출신으로 고려의 관료가 되어 국가 행정에 기여했다.
  3. 기타 발해 유민들 – 고려의 군사 및 행정 체제에 편입되어 국가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발해 문화의 고려 유입

발해 유민들은 고려 사회에 다양한 문화를 전파했다.

  1. 불교 문화 – 발해의 불교 사상이 고려의 불교와 융합되어 새로운 불교 문화 형성.
  2. 건축 양식 –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의 건축 양식이 고려의 건축에 영향을 줌.
  3. 행정 제도 – 발해의 관료 체제가 고려의 중앙 행정 체제에 부분적으로 반영됨.
  4. 유교 사상 – 발해의 유교적 전통이 고려의 학문과 정치 사상에 영향을 줌.

고려는 발해의 문화와 제도를 흡수하며 단순한 왕조가 아닌, 고구려와 발해의 후계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발해 유민과 고려의 관계 변화

고려 초기에는 발해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 왕실 내에서 발해 출신 세력의 영향력이 약해졌다.

관계 변화의 원인

  1. 왕권 강화 – 고려가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면서 지방 세력(발해 유민 포함)의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었다.
  2. 세대 교체 – 초기에는 발해 출신 인물들이 주요 관직을 차지했지만, 세대가 지나면서 고려 출신 관료들이 점차 주도권을 장악했다.
  3. 고려 내부의 정치적 변화 – 문벌 귀족 중심의 정치 체제가 확립되면서 발해 출신 인물들의 영향력이 감소했다.

그러나 발해 유민들은 고려 사회에 완전히 융합되었으며, 이후 고려의 문화와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결론

고려는 발해 멸망 이후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는 단순한 난민 수용이 아니라, 고구려와 발해의 후계 국가로서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전략적인 결정이었다.

발해 출신 인물들은 고려의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쳤으며, 고려가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비록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 내에서 발해 유민의 정치적 영향력은 줄어들었지만, 그들이 남긴 문화적 유산과 고려 사회에 미친 영향은 고려 왕조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왕건의 포용 정책은 결국 고려가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강력한 왕조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초석이 되었으며, 민족 통합의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FAQ (자주 묻는 질문)

1. 발해가 멸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발해는 926년 거란(요나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으며, 이후 많은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유입되었습니다.

 

2. 고려는 왜 발해 유민을 받아들였나요?
고려는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계 국가로 인식했으며, 같은 계통의 발해 유민을 포용하여 국가 통합과 세력 확장을 이루려 했습니다.

 

3. 발해 유민들은 고려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나요?
왕건은 발해 유민들에게 정착지를 제공하고, 발해 출신 인재들을 고려의 관료로 등용하는 등 적극적인 포용 정책을 펼쳤습니다.

 

4. 발해 출신 관료 중 유명한 인물은 누구인가요?
발해 왕족 출신인 대광현이 대표적이며, 그는 고려에 귀순한 후 왕건에게 환대받아 중요한 관직을 맡았습니다.

 

5. 발해의 문화는 고려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발해의 불교, 건축 양식, 행정 제도, 유교 사상이 고려의 문화와 제도에 융합되며 발전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6. 고려에서 발해 유민의 역할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변했나요?
초기에는 정치·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고려가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면서 발해 출신 인물들의 정치적 입지는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7. 고려의 발해 유민 포용 정책은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이는 고려가 고구려와 발해의 후계 국가로서 민족 통합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고려 왕조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정책이었습니다.

 

 

https://ekqwlckdrh.tistory.com/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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