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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1905년)은 일본이 대한제국(조선)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국권을 사실상 박탈한 불법적인 조약입니다. 이 사건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결정적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당시 민족적 저항과 비판이 극에 달했습니다.

 

많은 애국지사들은 이 조약에 반대해 순국하거나 의병운동을 일으켰으며, 이를 주도한 을사오적은 역사적으로 가장 비판받는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을사늑약의 배경, 체결 과정, 결과와 그에 따른 민족적 저항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을사늑약의 시대적 배경

러일전쟁과 일본의 승리

1904년부터 시작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격파하며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포츠머스 조약(1905)을 통해 일본은 국제적으로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일본의 대한제국 압박

러일전쟁 중 일본은 한일의정서(1904)를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일본의 군사 요충지로 삼았고, 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는 한편, 외교권을 빼앗아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완전히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고종의 자주권 수호 노력

고종은 일본의 압박 속에서도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적인 태도와 국제 정세의 불리함 속에서 외교적 대응은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을사늑약의 체결 과정

조약 강요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대한제국의 덕수궁 중명전에 군대를 동원해 고종과 대신들을 강제로 불러들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초대 통감이 될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조약 체결을 강요했습니다.

  • 고종의 거부: 고종은 끝까지 조약 체결을 거부했지만, 일본은 강압적으로 대신들을 협박하고 회유했습니다.
  • 을사오적의 배신: 이 과정에서 대한제국의 대신들 중 일부는 일본의 압력에 굴복해 조약에 서명하게 됩니다. 이들은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 서리태로, 역사적으로 을사오적이라 불리며 비판받고 있습니다.

불법적 조약 체결

을사늑약은 대한제국 황제의 공식 승낙이나 조인의 절차 없이 체결된 불법 조약이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완전히 빼앗겼으며, 국권 상실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을사늑약의 주요 내용과 결과

1. 외교권 박탈

을사늑약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것입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자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2. 통감부 설치

일본은 대한제국을 통제하기 위해 통감부를 설치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철저히 감시하고 지배했습니다.

  • 통감부 역할: 외교권을 장악한 일본은 통감부를 통해 대한제국의 정부와 정책을 좌지우지하며 식민지 지배를 준비했습니다.

3. 국권 침탈 가속화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은 국제 사회에서 외교적 발언권을 상실했습니다. 일본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대한제국을 철저히 예속시키며 식민지화를 위한 준비를 마무리했습니다.


민족적 저항과 을사오적 비판

고종의 저항

고종은 을사늑약이 불법적으로 체결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국제 사회에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는 등 저항을 이어갔지만, 일본의 방해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민족적 저항

을사늑약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 의병 운동: 애국지사들은 을사의병을 조직해 일본에 맞서 싸웠습니다. 특히 최익현, 신돌석 등 의병장들은 무장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2. 자결과 순국: 많은 애국지사들이 을사늑약에 항거해 목숨을 끊으며 항일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민영환, 조병세 등이 자결하였습니다.
  3. 언론과 여론의 비판: 당시 언론과 지식인들은 을사늑약을 체결한 을사오적을 강력히 비판하며 반일 감정을 고조시켰습니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실어 국민의 분노를 대변했습니다.

결론

을사늑약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식민지화를 준비하기 위해 체결한 불법 조약으로, 이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사실상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고종과 애국지사들은 이를 거부하고 저항했지만, 일본의 강압과 국제 정세의 한계 속에서 대한제국은 결국 국권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을사늑약은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이고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며, 이를 주도한 을사오적은 민족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국권 상실의 위기 속에서도 의병들의 저항과 애국지사들의 헌신은 민족의 자주 의식을 더욱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Q&A

Q1. 을사늑약은 언제 체결되었나요?
A. 을사늑약은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되었습니다.

 

Q2. 을사늑약의 주요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A.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고,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해 내정을 간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Q3. 을사늑약을 체결한 대신들은 누구인가요?
A. 을사늑약에 서명한 대신들은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 서리태로, 이들은 을사오적으로 불립니다.

 

Q4. 고종은 을사늑약에 어떻게 대응했나요?
A. 고종은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Q5. 을사늑약 이후 설치된 기관은 무엇인가요?
A.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임명해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했습니다.

 

Q6. 을사늑약에 대한 민족적 저항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A. 의병 운동, 애국지사들의 자결과 순국, 언론의 비판 등 다양한 형태의 저항이 있었습니다.

 

Q7. ‘시일야방성대곡’이란 무엇인가요?
A.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실은 논설로, 을사늑약을 비판하며 국민의 분노와 울분을 표현한 글입니다.

 

Q8. 을사의병이란 무엇인가요?
A.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일어난 의병 운동으로, 최익현신돌석이 대표적인 의병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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