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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 백제는 삼국 시대의 마지막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패망하고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678년 동안 이어온 역사가 막을 내렸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재위 641~660)은 즉위 초반 신라를 공격하며 한때 강한 국력을 과시했지만, 내부적인 정치 혼란과 나·당 연합군의 압도적인 공격을 막지 못하고 결국 패망하게 되었다.
의자왕은 즉위 후 신라를 강하게 압박하며 백제의 전성기를 다시 일으키려 했지만, 방탕한 생활과 귀족들의 분열, 그리고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반격에 나서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결국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공격하였고, 의자왕은 항복하면서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신라 공격 성공, 나·당 연합군 패배, 사비성 함락을 중심으로 백제 멸망의 과정과 의자왕의 마지막을 살펴보고자 한다.
신라 공격 성공 한때 백제의 군사력 강화
의자왕이 즉위한 641년, 백제는 신라와의 오랜 경쟁에서 다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적극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당시 백제는 전왕인 무왕의 정책을 계승하여 신라를 강하게 압박하고, 한강 유역을 다시 탈환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첫째, 의자왕은 즉위 후 신라의 40여 개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백제가 군사적으로 아직 강력한 힘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둘째, 신라의 수도 서라벌(경주)을 위협하며 삼국 간의 세력 균형을 변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백제는 신라를 지속적으로 공격하면서 고구려와도 협력하여 신라의 확장을 저지하려 하였다.
셋째, 신라가 외교적으로 당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신라는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당나라와 동맹을 맺으며, 백제와의 전쟁에서 나·당 연합군을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비록 초반에는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며 승기를 잡았지만,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결국 백제의 운명은 신라의 외교적 전략에 의해 결정되게 된다.
나·당 연합군 패배 전세가 역전된 백제
의자왕이 신라를 공격하는 동안 신라는 당나라와 긴밀한 외교적 협력을 맺으며 반격을 준비하였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형성되면서 백제의 운명은 급격히 기울어졌다.
첫째,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 13만 명이 백제 서해안을 따라 진격하였다. 당나라군은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며, 백제를 향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둘째,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5만 명이 백제의 동쪽 국경을 넘으며 백제를 협공하였다. 신라군은 백제 내부로 빠르게 진격하며, 주요 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셋째, 백제군은 나·당 연합군의 협공을 막아내지 못하고 황산벌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백제의 명장 계백이 이끄는 5천의 결사대가 신라군을 상대로 최후의 저항을 벌였지만, 결국 패배하면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고립되었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 영토로 빠르게 진격하면서, 백제는 방어할 여력이 부족해졌고 사비성의 함락이 눈앞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사비성 함락 백제의 최후
660년 7월, 나·당 연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포위하였다. 백제는 더 이상 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 의자왕은 항복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 의자왕은 나·당 연합군의 압도적인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하였다. 그는 왕족과 신하들과 함께 당나라군에 투항하였으며, 이후 당나라로 압송되었다.
둘째, 백제의 주요 귀족들과 장군들은 끝까지 저항하려 했지만, 결국 수도가 함락되면서 백제는 공식적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셋째, 백제 멸망 이후 일부 귀족과 장수들이 백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결국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을 이겨내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결론
의자왕의 백제는 초반에 신라를 강하게 공격하며 국력을 과시했지만, 결국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으며 전세가 역전되었다.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백제는 황산벌 전투에서 패배하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게 되었다.
백제의 멸망은 삼국 시대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독립을 유지하면서 통일을 이루게 된다. 한때 강력했던 백제는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백제의 문화와 기술은 일본과 동아시아에 깊은 영향을 남기며 계속해서 전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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